키보드도 펜도 모두 너무나 성합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대구 여행.
보고 싶은 사람과의 만남도 기다렸지만 아름답다는 대구 간송미술관도 또한 적잖이 기대했다. 얼마나 좋은 미술품들이길래 전재산을 팔아서 샀을까. 약간의 푼돈도 아까워하는 나로서는 그 큰 마음을 이해하는 건 바닷물이 소금이 될 정도의 시간이 지나야 이해할까.
기대 속에 방문한 그곳은 역시나 주변 경관도 아름다웠고 미술관 건물 자체로도 아름다웠고 그 속의 미술품 또한 더 이상 설명할 필요 없이 아름다웠다. 이래서 다들 이곳을 들르는 것이로구나. 길게 늘어선 관람객의 줄이 이해될 만한 것들이었다.
그러던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미술품도 조각품도 훈민정음해례본도 아닌 추사 김정희 선생의 말이었다.
너무도 유명한 추사 선생의 글 옆에 적힌 이 글귀.
벼루 하나를 다 쓰는 것만도 엄청난 시간일 텐데 열 개라니.
게다가 붓은 천 자루? 붓이 그렇게 쉽게 닳는 것이었던가.
그저 입이 떡 벌어지는 내용이었다.
물론 칠십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이긴 하지만 인간의 삶이 좀 바쁜가. 하루에 못해도 최소 5~6시간은 잘 테고, 먹고, 움직이고, 사람도 좀 만나고, 여행도 다니고, 일도 좀 하고.. 그럼 사실 그중 글씨연습은 고작해야 몇 시간일 텐데. 가능한 일인가.
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같이 갔던 친구 작가님들이 하는 말.
"김은희 작가는 1년에 노트북 한대를 산대요. 키보드가 너덜거려서."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우리나라에서 글 잘 쓰기로 소문난 사람이 이렇게나 열심히 쓴다고?
생각의 흐름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난 개인 노트북이 없으니 그럼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노트북을 사야 할까?
그리고는 열심히 노트북 구매를 위한 서치에 돌입한다.
사양을 비교해 보고 몇 개는 장바구니에도 넣어보고 구매평도 사전 읽듯이 샅샅이 훑어본다.
그러다 문득, 이런 도구는 그야말로 도구일 뿐.
이런 물질로 나라는 인간이 변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도 노트북이 없어서 글을 못 쓴 것은 아니고, 책이 없어서 못 읽은 것이 아니다.
다이어트하는 방법을 몰라서 살을 못 빼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조용히 검색창을 닫고 눈앞의 책을 집어 들었다.
읽자. 들어오는 것이 있어야 나가는 것이 있지.
그리고 노트북은 정 쓸 수 있는 수단이 없으면 사는 걸로 하자.
다시금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귀를 눈으로 읽어본다.
내 나이가 칠십이 되면 난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도 조용히 내 할 일은 했다고 말하려면 뭘 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 중인데 핸드폰 알람이 반짝인다.
'무선 올인원 컴퓨터'
에라, 내 생각이 천지를 돌고 도는 동안 컴퓨터 광고만이 나를 몇 날 며칠 따라다니겠구나.
그러든가 말든가, 읽고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