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9할은 운이다.
신입사원 대기업 취업 글이 어딘가에 올라갔는지 조회수가 갑자기 많이 나온다. 별 글도 아닌데 읽어주셔서 감사하니 신입사원 연수시절 글을 하나만 더 올려본다. 이렇게 오래된 옛날이야기를 계속 우려먹어서 미안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린다. 심지어 요즘 신입사원 연수는 어떤지 전혀 알지도 못한다. 그저 라떼 시절 이야기려니 하고 재미로 봐주시길.
보행랠리 : 오리엔티어링과 유사한 체험학습기법이다. 참가자가 다양한 페어(pair) 또는 그룹이 되고, 지도와 포인트체크카드를 갖고 지정된 복수의 체크포인트를 지정받은 속도로 돌아가는 경기로 목표지점 도착 후 시간점과 과제점으로 집계하여 순위를 결정한다. 체크포인트는 5~7개 장소에 2~7킬로미터의 간격으로 설치한다. 참가자로서는 포인트 간의 거리는 알 수 없지만 지정된 속도로 걸으면 포인트를 알 수 있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행랠리 [步行-, Walk Rally] (HRD 용어사전, 2010. 9. 6., (사)한국기업교육학회)
신입사원 연수의 정점은 보행랠리였다.
근데 왜 굳이 한밤중에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회사 소유의 호텔에서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하는 교육프로그램이라 일단 뭐든지 좋았다. 저녁식사는 호텔 총지배인님이 나오셔서 양식 코스요리의 식탁예절을 알려주셨고 오래간만에 먹는 스테이크를 두둑이 먹고는 기분 좋게 배를 두드리는 중이었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밤 9시에 모여도 그저 싱글벙글할 뿐이었다.
전체 그룹을 3-4명씩 조를 짜서 50개가 넘는 조를 만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근데 문제는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출발 조였다. 출발하는 것보다 기다리는 것이 사람을 더 지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저녁을 많이 먹어서 매우 졸리는 상태였다.
우리 조는 같은 계열사의 동기, 나이로는 오빠인 조원 한 명과 다른 계열사의 또 다른 오빠 한 명이었다. 워낙 출발이 늦다 보니 시간이 남고도 너무 남아서 우리는 어떻게 랠리를 이어나갈지 천천히 시뮬레이션을 하며 작전을 짰다. 우선 각 구간별로 보행해야 할 속도가 정해져 있었는데 우리는 그 속도보다 일단 더 빠르게 구간을 지나가기로 했다. 분명 중간에 풀어야 할 문제를 풀 때 지체되는 구간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고, 길도 전혀 모르는 곳이라 지도를 잘못 읽어서 다른 길로 갈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다.
기다림에 지쳐서 스테이크가 다 소화될 즈음 출발을 했다. 일단 바깥에 나가니 기분이 좋았다. 분명 겨울이었을 텐데 춥다는 느낌도 전혀 없이 날씨가 좋았다. 우리보다 조금 일찍 출발한 조원들이 앞에 보였지만 우리는 원래 세운 계획대로 그들을 앞질러 나갔다.
초반 진행은 순조로왔으나 중간의 체크 포인트에서 넌센스 문제를 풀 때는 순간 머리에 쥐가 났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동기 오빠가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는 문제란다.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덕분에 쉽게 난코스를 벗어났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대로 시간이 갈수록 지도의 포인트들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지도는 전체를 나타낸 일반적인 지도가 아니고 아주 단순하게 선과 점 그리고 속도만 표시되어 있는 형태여서 주변 지형지물은 전혀 나타나있지 않았다. 그 선과 점 또한 구간 구간의 정보이고 이어지지 않는 것이어서 우리는 그저 길이 직선인지 꺾은 선인지만을 보며 길을 더듬어 가고 있었다. 벌써 우리보다 먼저 출발한 수많은 조들이 헤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서로를 돕고 싶지만 그들이 어느 포인트에서 헤매는지 알 수 없으므로 도움을 주기도 불가능했다.
우리 조는 처음에 세운 계획대로 각 포인트들을 지도에 체크하며 그다음 지점을 더듬어 나갔다. 차츰차츰 가다 보니 어느덧 마지막 지점. 마지막 지점은 처음 출발 지점이었고 밤 열두 시가 넘어 들어왔는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따끈한 컵라면이었다!!! 이 교육 준비한 사람 누구야. 센스 넘치네! 교육팀 사랑한다고 외칠 뻔했으나 그 소리는 라면줄기로 막혔고, 내게는 뜨끈한 라면으로 배를 채운 기분 좋은 노곤함만이 남았다. 우리는 마지막 출발조였으나 막상 도착점에 왔을 때는 우리보다 늦게 도착한 팀들도 몇 팀 남아있었다. 우리가 어느 정도로 시간을 잘 맞춘 건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일단 성적이 나쁘지는 않겠다고 예상했다.
드디어 모든 팀들이 다시 강당에 모였고 마지막 결과 발표만이 남았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한참 넘긴 상황인 데다 뱃속에서 불고 있는 라면으로 에너지가 모두 몰린 탓인지 눈꺼풀을 들어 올릴 힘이 점점 빠져나가고 있었다. 처음 내준 지시서대로 따랐을 경우 걸리는 시간과 가장 가까운 시간을 기록한 팀이 우승을 하는 규칙에 따라 각 팀별 소요시간을 하나씩 공개하는 순간이었다. 역시나 제일 마지막 조인 우리의 성적은 제일 마지막에 공개되었다. 그런데 이게 뭐지!!!! 우리 조는 기존의 지시서와의 오차가 19분이었고, 그날의 우승조였다!!
어디 가서 눈에 띄는 사람이 아닌 나는 이날 운이 좋게도 꽤 점수가 높은 프로젝트 중 하나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거의 막판 뒤집기 느낌으로 계열사 신입사원 중 최고점수로 우수사원상을 받게 되었다. 그 누구도 심지어 나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이렇게 사랑하는 공짜밥, 공짜 숙소에 이어 상품권까지 받게 되는 행운을 누리며 장장 3개월의 신입사원 연수는 이렇게 끝이 났고, 우수사원이 되는 바람에 도대체 언제 찍은 건지 기억도 안나는 스키캠프에서 얼굴에 페이스 페인팅을 하고 찍은 사진이 회사 사보에 실리게 되는 영광을 얻었다.
역시 대기업은 좋더라.
계열사 중 하나인 패션회사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상품권으로 남자친구와 옷을 하나씩 사 입고 뿌듯하게 첫 출근을 기약했다.
출근 전날에는 우수 신입사원은 뭔가 달라야 한다는 부담감도 살짝 들었으나 회사라는 또 다른 놀이터에 가는 느낌으로 기분이 들떴다. 아무렴 어떠랴. 일단은 취업에 성공한 신입사원이니 잠깐은 들떠도 되겠지.
그런데 그것이 정말로 잠깐일 줄 그때는 전혀 몰랐다. 계속 꿈속 같은 생활만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는 참으로 순진하고도 순수했던 사회 초년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