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학교, 대체 누가 가는 건가요?
족보도 없고 기준도 없는 입시 지옥을 맛보다
며칠 전, 특수학교를 지원했던 비단이의 초등학교 발표가 있었다. 혹시나 했지만, 결과는 참담한 올킬이었다. 특수학교만을 지원했던 비단이는 1지망부터 3지망까지 모조리 떨어졌고,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했기에 '임의배정' 절차만을 남겨두고 있다. 임의배정이란, 지망학교 모두를 떨어진 아이를 말 그대로 아무데나 배정해주고 입학할지의 여부를 부모에게 토스하는 제도라고 보면 된다. 무발화에, 제스쳐 소통만 일부 가능하고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비단이가 일반학교를 간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선택지였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초등학교 입시를 낙방했고 강제 유예를 결정하게 되었다.
교육청으부터 결과 통보 전화를 기다리며, 솔직히 나는 내심 붙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내 자식이지만 냉정하게 평가해볼 때, 비단이의 장애상태는 또래의 발달장애 친구들에 비해 많이 심각하다. 일단 의미있는 단어의 발화가 거의 없고, 수년간 가르쳤음에도 발화를 해야한다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약물치료를 병행하고 있지만 타해 성향이 완전히 소거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젓가락과 컵을 사용하지만 도움없이 백프로 혼자 식사를 하기는 부족하다. 게다가 대소변도 가리지 못해 기저귀를 차고 있는 아이가 아닌가. 그런데도 비단이가 특수학교를 갈 수 없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이유라도 알자 싶어 교육청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 선생님, 저희 아이가 왜 심사에서 떨어진건지 여쭤보고 싶어서요.
- 지원하신 1지망 학교에서는 이번에 신입생을 12명 뽑았는데요.. 간단히 말씀드리면 비단이보다 장애가 심한 친구들이 더 많았다고 생각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선생님, 장애가 심각하다는 기준이 뭔가요? 특수학교를 지원할 정도라면 모두가 심한 장애에 해당하는 친구들인 것은 똑같지 않나요? 이제는 법이 바뀌어서 공식적으로는 등급도 숫자로 나뉘지 않잖아요.
- 사실 제가 실사를 나갔을 때, 비단이를 직접 보았습니다. 비단이 담임선생님과도 이야기를 나누었고, 작성해주신 서류와 여러가지를 판단했을 때 비단이는 특수교육이 꼭 필요한 아이라고 판단했어요. 그런데 지원한 친구들 전체를 보았을 때는 비단이보다 도움이 필요한 친구가 더 많아서 줄을 세우니 순번에서 밀렸던 거에요.
- 도움이 더 필요하다는 기준은 뭔가요?
- 음... 이를테면 똑같이 기저귀를 차고 있어도 쉬야를 했다고 표현할 수 있으면 자조능력이 있다고 보는거고 의사표시를 하지 않는다면 도움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합니다. 둘 다 숟가락질이 서툴다면, 숟가락을 들 힘이 좀 더 없다고 판단되는 친구가 우선순위가 되요. 사실 어머님들께서는 선뜻 받아들이시기 어려울 수도 있는 기준일 수 있습니다만 현실적으로 줄을 세워 입학시키다 보니 이런 상황이 매년 생기네요...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집이 멀어서 떨어졌다거나 하는 이유라면 납득할 수 있었다. 어찌됐든 공식적인 기준에서 근거리 거주 역시 중요한 조건이었으니까. 그러나 담당자의 말대로라면, 어린이집으로 실사를 나온 그날 삼십분 동안 최선을 다해 열심히 뭔가 보여주려 한 아이는 떨어지고, 그날 컨디션이 최악이라 잘 하던 것도 못한 아이는 상대적으로 붙을 확률이 더 높았다는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천하제일 눈속임 대회도 아니고, 이런 말도 안되는 기준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엄마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들려오던 '특수학교 입학 비법'이 떠올랐다. 약을 먹는 아이라면 그날은 약을 먹이지 않고 등원시키거나, 아이가 정말 싫어하는 환경을 억지로 만든다고 했다. 가령 잠을 안재우거나, 싫어하는 옷을 입히는 식의 방법을 동원하여 아이가 짜증이 최고조가 되도록 한 후 등원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믿기 어려운 비방을 들었을 때 나는 그냥 피식 웃고 넘겼었다. 적어도 공교육의 시작, 초등학교 입학인데 그런 식으로 판단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여겼다. 그저 엄마들의 간절함이 만들어낸 상황의 일부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 말도 안되는 이야기는 슬프게도 사실이었다. 나는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비단이의 소식을 전하며 당일의 상황을 확인해보았다.
- 어머니, 사실 그날 말씀은 안드렸지만 저희는 속으로 아이들 보면서 '망했다' 싶었어요.
- 비단이랑 그날 같은 반 친구 한 명이 면접을 같이 봤어요. 우리 아이들이 참 웃픈게, 낯선 사람이 오면 평소에 그렇게 말을 안 듣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해요. 자기를 알아달라는 듯이 다가가서 예쁜 짓도 하고요. 그런 모습이 아이들한테는 사랑받고 싶은 간절함이고 마음인데, 평가하는 분들 입장에서는 잘한다고 여겨져서 뒷순위로 밀리는 결과를 낳는 거죠. 일부러 아이들을 스트레스 환경에 노출시킬수도 없는 노릇인데, 저희도 이럴 때마다 참 속상하네요.
그렇다. 우리 비단이는, 그날 낯선 사람들이 오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움직였다. 이름을 부르면 웃고, 평소에는 잘 하지 않던 지시따르기도 열심히 해보려 노력했을 것이다. 그래야 사랑받고 예쁨받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니까. 우리 아이들에게 허락된 지능은 내가 잘 못해야 뽑힐 수 있다는 것까지 계산하거나 노력해서 행동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는 그런 비단이를 비난할수도, 왜 그랬냐고 나무랄 수도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명확해진 사실은,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우리의 특수학교 입학은 그야말로 '운빨'에 기대야 한다는 것이다. 족보도 없고 기준도 없는 이 터무니없는 입시에서, 아이에게 장애가 더 심해지라고 할 수는 없으니 매년 계란으로 바위치는 심정으로 도전을 계속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도태되는 쪽을 택하거나. 다른 선택지는 우리에겐 없는 것 같다.
잠든 비단이의 얼굴을 본다. 볼록한 볼을 하고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내 아들. 남들 당연하게 다 가는 초등학교도 우리는 이렇게 가기 힘들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을까. 살면서 우리가 넘어야 할 벽은 몇 개일까. 우리 앞에 높은 돌은 걸림돌일까, 디딤돌일까. 너에게 이건 디딤돌이라고 알려주고 확신에 찬 손을 잡아주어야 마땅한데, 엄마는 오늘 대답이 망설여진다. 끊어져버린 돌다리를 앞에 두고, 나는 너를 업고 건너야 할지 물에 함께 빠져야 할지 잘 모르겠어. 오늘은 그저 달게 자고 있는 네 옆에서 너와 숨을 나누며 깊은 잠에 빠지고 싶다. 그래야 내일 다시금 좋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