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2020)>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2020)>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비 오는 날 정처 없이 걷는다. 무드에 취해 자신이 비련의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지독하게 반복되는 이미지가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재즈 음악, 사랑과 불륜, 그리고 고뇌에 빠진 남자, 이런 것들은 마치 홍상수 영화에서 술자리와 한심해 빠진 남자 주인공이 항상 등장하는 것과 같이 우디 앨런 영화에서 좀처럼 빠지지 않는다.
그의 영화에선 어딘가 산만한 느낌을 늘 지울 수 없다. 대사들이 치고 빠지는 호흡은 빠른데 어느 중요한 시점을 향해 끌고 가는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서 말했던 비슷한 이미지들이 어수선하게 배치되니 나중에는 내가 그의 영화 중 어떤 것을 봤는지도 헷갈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까지 애매하게 끝내는 경우는 거의 없는 듯하다.
<레이니 데이 인 뉴욕> 역시 마지막은 해피한 키스 장면으로 끝난다. 셀레나 고메즈는 정말 ‘영화’처럼 드라마틱하게 등장해 티모시 살라메의 입술을 덮쳐버린다. 이는 모든 관객들이 염원하던 결말이다. 하지만 이를 위한 빌드업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 맥락이 부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극적인 만남을 위한 것이라면 왜 그토록 쓸데없는 농담과 짧게 스쳐가는 인물들이 이리도 많은 것인가? 감독, 각본가, 배우는 모두 애슐리에 미쳐버린 듯 괴상하게 행동하고, 개츠비의 형은 끝내 웃음소리가 기괴한 약혼녀와 결혼을 하게 됐는지 미결인 채로 남겨둔다. 대체 이들은 왜 등장하는 것인가? 이런 의문들이 관객들을 끊임없이 혼란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감독이 이토록 난잡한 배치를 택한 의도는 분명 있을 거다.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풍자하려는 인물과 자기 투영을 하는 인물을 비교적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애슐리는 영화에서 대표적인 희화화 대상이다. 그녀는 예술과 유명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지만 작품의 깊이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는 여자다. 그런 그녀를 꼬시기 위해 감독과 각본가, 심지어 유명 배우까지도 온갖 미사여구를 곁들여 애슐리를 유혹하려 든다. 이들 역시 감독이 비판하고자 하는 전형적인 대상으로, 우디 앨런이 애슐리와 관련된 인물들에게 구원의 여지를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개츠비는 감독이 자신을 투영하는 대상이다. 애슐리는 그가 아스퍼거스 증후군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고 무시하지만, 그는 어머니가 맺어준 인연일 뿐인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순정남의 면모를 보인다. 그는 개인적으로 방황을 하긴 하지만 속물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사람다운 인물로 묘사된다. 마치 데이지를 향한 맹목적이고 우직한 사랑을 보여준 <위대한 개츠비>의 ‘제이 개츠비’처럼 말이다. 아마 배역의 이름이 그렇게 정해진 건 이 위대한 미국 소설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예상하는 작품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미국 문학의 또 다른 대표 격인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책의 주인공 콜필드는 개츠비와 같이 명문 사립 고등학교에 다녔고, 뉴욕에서 홀로 호텔을 떠돌며 방황한다. 둘의 성격은 비슷하다. 묘하게 사교성이 떨어지고, 누군가 억지로 시키는 것에 대한 반항심이 투철한 편이다. 감독은 왜 콜필드의 이미지를 이 영화에 끼워 넣은 것일까?
앞서 말했듯 개츠비는 감독 자신을 녹여낸 캐릭터다. 그의 내면을 보여주는 핵심점인 대사는 챈과의 대화 장면에서 등장한다. “미래 목표가 뭐야?”라고 묻는 그녀의 질문에 개츠비는 “허우적대는 중이야. 뭐가 되고 싶은진 모르겠는데, 되기 싫은 것만 알겠어.”라고 대답한다. 필자는 이 대사에 꽂혀버렸다. 사람들은 늘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하지만 그것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바라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곤 한다. ‘잘못된 방향으로 열심히 노를 젓는 것보단 가만히 있는 게 낫다.’라는 격언이 떠오른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상태를 심하게 경계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개츠비가 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뉴욕 길거리를 걸었던 것처럼, 때로는 우리에게 이러한 여유와 여백이 절실한 것이다.
여러 생각들을 거치고 나니 메시지가 나름 정리되는 것 같았다. 왜 이토록 자잘하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두서없이 나열해둔 것일까. 필자는 감독이 관객들에게 머리를 비우며 생각에 잠길 여유를 주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농담들은 숨은 의미가 별로 없을지 모른다. 마치 다코타 패닝의 동생인 엘르 패닝에게 디에고 루나가 “언니는 얼마나 예쁘냐?”하며 묻는 장면처럼 말이다.
우디 앨런의 영화는 마치 재즈 음악처럼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모양새를 하고 있다. 가벼운 농담처럼 이야기를 건네었다가 금세 진지한 면모로 자신의 철학을 드러낸다. 속물 같은 인물들을 풍자하는가 하면, 진지한 사랑을 일궈내는 성실한 해피 앤딩을 빼놓지 않는 섬세함을 갖고 있다. 여러 스케일과 키를 오가며 연주되는 재즈처럼, 우디 앨런 영화 특유의 버라이어티로 마냥 보고 즐기게 되는 마력이 존재한다. 고령의 나이지만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는 그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되고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