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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선비 Jun 11. 2022

작별인사와 블레이드 러너

김영하 소설 <작별인사>

*소설 <작별인사>의 결말 및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작별인사를 다 읽었다. 생각보다 짧은 소설이었다. 잔잔하게 이야기가 진행되다 마지막에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쏟아져 나오는 느낌이다. 조금 더 길었으면, 이야기 배경 설명이 자세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 조차도 작가의 안배이려니 싶다.

 소설의 배경은 AI가 사회 문제가 된 근미래의 한국이다. 영화 <아이, 로봇>처럼 살인광 로봇이 인간을 죽이고 다니는 흥미진진한 내용은 아쉽게도 아니다. 작별인사라는 제목답게 쓸쓸한 분위기가 작품 전체를 지배한다. 주인공 철이는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휴머노이드 로봇이다. 그는 인간을 멸망시키는 주체도 아니고 휴머노이드의 자유를 쟁탈하는 혁명가 또한 아니다. 그저 자신의 인생을 조용히 살다가 작별을 고하고 떠나는 한 개체일 뿐이다. 비록 로봇이지만 그의 삶은 인간을 닮아 있다. 존재를 탐구하고 때론 고통을 겪기도 하면서 천천히 스러져 가는 보통의 인간 말이다.




 소설의 기본적인 주제는 리들리 스콧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와 비슷하다. 영화에서도 AI가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던지는 주체로 등장한다. 그들 역시 심적으로 취약하고 병들었다는 점에서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 다른 점이라면 인간에 의해 수명이 제한되고 피지배를 당하는 ‘노예’라는 점뿐이다. 하지만 인간 역시 알게 모르게 권력과 자본에 지배를 당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만약 인간이라는 이유로 모두가 자유로웠다면 블레이드 러너나 작별인사나 공감을 얻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관객과 독자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처럼 사고하는 휴머노이드들이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와 동시에 묘한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가끔 지인들과 술을 먹고 대화하다 보면 다들 인생이 무슨 의민가 싶다고 한다. 치열하게 경쟁해서 살아남고, 능력을 얻어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으면 레이스는 다시금 반복된다. 이 순환 고리에 의미를 찾으라면 누구도 선뜻 절대적 가치를 댈 수 없을 것이다. 로봇들이 하는 고민이지만, 우리가 매일 고뇌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별인사엔 AI 외에 클론이라는 개념도 존재한다. 이들은 복제인간으로 다른 인간의 장기를 조달하기 위한 ‘도구’로 생산된 물자이다. 이들 역시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사고하고 고통을 겪으며 영적인 사유를 한다. 클론을 대표하는 캐릭터는 ‘선’이다. 철이가 철학의 ‘철’ 자를 써서 자신의 존재를 사유하는 존재로 등장한다면, 선이는 아마 신선의 ‘선’ 자를 가져오지 않았나 싶다. 그녀는 영적인 카리스마로 주변을 압도하고 결말부에 이르러서는 영과 대지의 합치를 이루어 승천한다. 소설 전체에서 가장 마이웨이로 막힘 없이 자신의 스토리를 완성하는 캐릭터다. 철이는 그녀와는 반대로 목이 잘리고 고양이 몸에 기생하는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는다. 선이가 나르치스라면, 철이는 골드문트인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가 앞으로 도래할 AI와 미래의 이미지를 화려한 그래픽으로 제시했다면 작별인사는 거기서 흥미 요소를 세네 스푼 덜어내고 철학을 한 포클레인 가미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 대고 표절이니 아이디어를 베꼈느니 하는 건 어리석은 소리고, 나름 시대를 관통하는 질문을 던진 작품이라 평가하고 싶다. 청년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건 매우 가파르게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사회적 제도로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이유는 결혼이건 출산이건 모두 ‘개인적인’ 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도무지 이런 개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저 뭉뚱그려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정책으로 어설프게 해결하려 할 뿐이다. 하지만 예전처럼 일관된 사회 분위기를 따라 자식을 낳고 국가 재건에 힘쓰는 시대는 여간해서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슬프지만 현실이다.


 이렇게 말하면 ‘잘난 척하는 당신은 해답이 있어?’할지 모른다. 그렇다. 없다. 나 조차도 장차 애를 낳을지 말지에 대한 고민에 답을 준비하지 못했다. 하지만 클론인 선이의 장기를 탐내던 소장의 그득한 욕심처럼, 그저 맹목적인 삶의 연장 의지는 해답이 될 자격이 없다. 살아갈 이유는 모두가 제각 기인 것이다. 절대적인 누군가가 나타나 ‘A가 사는 이유니 그것에 따라라.’라고 말한다면 그보다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결코 누가 대신 풀어줄 수 있는 숙제가 아니다.


난 여전히 나의 살아갈 ‘개인적’ 이유를 찾고 있다. 평생에 걸쳐 찾지 못할 수도 있고, 운이 좋다면 야생 곰에게 처참히 찢길 때의 철이처럼 죽기 바로 직전에 깨달을 수도 있다. 이를 누가 알겠는가. 선이는 선이의 삶이, 철이에겐 철이의 삶이 있었다. 둘 중 누구의 삶도 흉내 내지 않는 것만이 곧 나의 삶이 될 것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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