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
파리는 오랫동안 사랑의 도시라는 자리를 유지해 왔다.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연인들의 손짓, 지하철 플랫폼에서의 입맞춤, 세느 강변에서 어깨를 기대고 산책하는 모습은 한없이 낭만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누군가는 사랑이 마치 파리의 공기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랑으로 가득한 도시는 기울어져 있다.
파리에서 끈적이는 연인들의 눈빛에 관심을 두는 이는 많지 않다. 나 같은 외부인을 제외하고는 공기 같은 사건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장면들을 오래 바라보게 되면 작은 진실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입맞춤을 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입맞춤을 기다리는(혹은 받아주는) 사람이 있다.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는 묘한 표정, 기다렸다는 듯이 벗지는 미소, 이들 사이에는 묘한 불균형이 숨 쉬고 있다.
공원에서는 벤치의 간격이 관계의 간격을 대변한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어도, 몸이 조금 더 기울어진 쪽이 누구인지, 다리를 떨고 있는 쪽이 누구인지에 따라 그 둘의 관계를 알아차릴 수 있다. 책을 읽고 있지만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사람, 휴대폰을 위에서 길을 잃은 손가락, 나란히 앉아 이어폰을 나눠 끼고 노래를 듣고 있지만, 기대에 찬 눈과 들려오는 가사에 집중하는 모습들. 이렇듯 작은 벤치 위에서도 사랑의 불균형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기다림과 무심함, 기대와 고민이 동시에 존재하는 순간에 갈망하는 쪽과 또 더 크게 갈망하는 쪽이 함께 앉아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파리의 사랑은 자유롭고, 또 평등할 것 같지만, 분명하게 드러나는 불균형이 있다. 기다리는 이와 걸어오는 이 사이에는 맞춰질 수 없는 불리함이 존재한다.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이 기록은 바로 그 지점에 집중되어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버린 시간들, 그 위에서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 흔들리고 또 없어지는 나 자신의 모습에 집중한다.
작품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기다리는 위치에 놓여 있다. 그녀는 오직 한 남자의 부재와 도착으로 하루를 나누게 된다. 그의 전화를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내고, 그가 떠난 뒤 남겨진 공간을 지켜보면서 그와의 시간을 회상한다. 그의 흔적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리듬을 잃는다. 어느 날에는 몇 시간, 어느 날에는 며칠이라는 기다림을 전달받고, 그녀는 완벽한 약자가 된다.
그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에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책을 펼치지만 문장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음식은 습관처럼 삼켜질 뿐이다. 탁자 위의 전화기, 남겨진 재떨이, 전날 벗어 둔 구두, 이 모든 풍경은 그녀의 기다림을 증명한다.
기다리는 동안 그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는 분명 또 다른 일상에 충실하고 있을 것이다. 가족과 함께하거나, 지인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혹은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무얼 하는지가 아니라, 기다리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이 나뉘어 있다는 사실이다. 기다리는 이는 기다리게 만든 쪽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더 알고 싶어 한다는 상화 자체가 이 둘 사이의 권력 불균형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의 부재가 누군가의 존재를 재단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더 이상 나로 존재하지 못하고, 오직 그를 중심으로 한 궤도를 돌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사랑이 삶의 이유인 동시에 자기 자신을 잃게 만드는 감옥을 만들어 냈음을 알아차리고 만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러한 불균형조차 불쾌함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기다리는 시간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기다림을 설렘으로 포장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가 된다는 당연한 믿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고, 함께 하고 싶다는 요구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유아 어찌 되었건 작품은 이러한 위계를 서스름 없이 드러낸다. 누군가의 시간이 다른 누군가의 무심함에 의해 지배되는 차가운 구조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감정이라고 치부하지만, 그 본질에는 끊임없이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일이다. 개인적인 감정을 타인에게 이입시킨다는 것 자체에서 불안정성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때로는 그 감정적 혹은 육체적 요구에 타자의 시선이 짙게 드리워지기도 한다.
작품 속에서 그녀는 연인의 방문에 맞춰 자신의 일정을 모두 비워두는 모습을 보인다. 그가 몇 시에 올지, 어쩌면 올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지만, 만일의 가능성을 위해 하루를 공허하게 비워두는 선택을 한다. 기다림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그의 시선에 의해 규정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 사람이 한 시간 후에 도착한다고 알려오면─그런 경우는 그가 아내의 의심을 사지 않고 늦게 들어갈 수 있는, 말하자면 좋은 ‘기회’였다─나는 또 다른 기다림 속으로 빠져든 나머지 생각을 할 수도, 무언가를 바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내가 즐길 수 있을지 자문해보아야 할 정도였다). 샤워를 하고 유리잔을 꺼내놓고 매니큐어를 바르고 집 안을 정돈하는 일 등,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못하고 그저 마음이 들떠서 부산을 떨 뿐이었다. 나는 내가 기다리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자동차가 문 앞에 와서 멈추는 소리, 자동차 문이 닫히는 소리, 문지방을 넘는 그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는 순간이 오면 나는 항상 온 신경이 곤두서면서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녀는 기다림의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다. 말하자면 좋은 기회, 그저 마음이 들떠서 부산을 떨고, 기다리는 사람 말고는 모든 것이 사라진 상태, 신경이 곤두서면서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경험. 그녀의 사소한 흔적들은 그녀 안에 있는 욕망을 증명하는 기념물처럼 남고, 그녀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그 관계에 종속되어 있는지를 절감한다.
그녀의 욕망이 글로 기록하는 순간, 그곳에는 또 다른 시선들이 개입하게 된다. 독자라는 또 다른 타인들의 시선이다. 에르노는 이를 결코 회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이야기를 쓰는 동안 끊임없이 누군가는 그녀를 비난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식했다고 고백한다. 실제로 누군가의 욕망은 종종 사회적으로 수치심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게 도덕적이든, 혹은 그렇지 않든. 하지만 작품은 개인의 욕망을 은폐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열정》은 이처럼 개인적인 욕망을 기록함으로써 두 겹의 불안정성을 드러내고 있다. 한 겹은 연인이라는 타자의 무심한 시선 앞에서 무너지는 개인의 욕망이고, 다른 한 겹은 사회와 대중의 시선 속에서 평가받고 규정되는 대중적 욕망이 그것이다.
파리의 거리,
낭만적인 입맞춤 끝에
남겨진 것
끝을 모르는 불균형 뒤에는 사랑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은 순간이 따라온다. 기다림의 시간 동안 그녀는 "그가 올 거야"라고 쓰고, 그가 돌아간 뒤에 "그 사람이 왔다"고 기록한다. 짧은 이 두 문장은 하루의 주도권이 완벽하게 그에게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녀의 기록에는 '나'가 사라지고, 문법적으로 주어가 점유할 자리에는 '그'가 있다. 더욱 흥미로운 부분은 이 두 문장 사이에 적잖은 시간적 공백이 존재했음에도 결코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거나, 정서적 부재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잠시 멍한 기분에 빠져들게 된다. 방금 끝이난 몇 시간의 밀회를 다시 떠올랐을까? 어쩌면 짧았지만 강렬했던 그와의 시간에 뒤따라 등장하는 정서의 과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겪은 잠깐의 공백은 스스로를 정의하기 위한 존재의 중단이었음이 분명하다. 하루의 의미를 완성하는 주체가 내가 아니라 그임을, 그리고 나의 시간이 그의 도착으로만 완결되었다는 사실을 체감한 것이다.
나는 가끔 백지 위에 날짜, 시간, 그리고 “그가 올 거야”라는 문장을 적고 그 사람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그 사람의 사랑이 식었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운 마음을 끄적였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같은 종이에 “그 사람이 왔다”고 쓰고 우리 만남의 세세한 사항들을 두서없는 글로 적어두었다. 그런 다음 그 사람을 만나기 전과 후에 쓴 두 글의 내용이 끊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을 보고는 잠시 멍한 기분을 느꼈다.
"그가 올 거야"와 "그 사람이 왔다"라는 문장이 너무나도 매끈하게 이어지는 하루, 이 두 문장 사시에 존재했던 시간 동안 그녀는 완벽하게 해체되어 사라졌다. 작품에서는 그가 남기고 간 잔, 침대의 주름, 옷의 섬유 냄새 같은 잔재들을 서사의 중심으로 옮겨 놓는다. 정작 기록하는 사람의 서사는 없고, 기록한 것만 남게 된 것 같은 느낌. 무엇이 있었고, 어떤 일이 있었고, 또,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만 남았고, 그녀 자신은 기다리는 존재로써의 기능만을 수행하듯 기록한다.
그렇다면,
나의 사랑은
얼마나 평등했을까?
사랑을 동등한 독립된 두 사람이 공유하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동등한'이라는 수식어는 감정적으로 서로 얽히지 않은 상태에서만 유효하다는 사실에 집중해야 한다. 독립된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만들어지는 관계에 완벽한 균형이라는 상태가 존재할 수 있을까? 김지영을 두고 이야기가 흘러나왔을 때도, 그전에 연지의 선택을 접했을 때도, 관계에서 오는 자연스러움까지 부자연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에 놀랐다.
사랑에 누군가는 약자가 된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건, 관계에 더 간절한 사람이건,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건, 약점을 잡힌 사람이건 관계없이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에 맞춰 자신의 서사를 이어간다. 이런 걸 보면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비대칭적 관계에서 출발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원리가 도시마다 다르게 적용될 거라는 기대는 접어두었으면 한다. 사랑의 도시에서도 누군가는 기다리고, 또 누군가는 기다리게 만든다. 누군가는 관계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다른 누군가는 그 상실 위에서 안식을 누린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여성(혹은 남성)이라고 단정 짓고 싶지 않다. 있는 그대로의 그 시선이 낭만으로 포장하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그냥 받아들이라는 대답은 폭력적이다.
당신이 사랑은 과연 평등했나요?
에르노가 남긴 기록은, 이 질문 앞에서 잠시 멈추게 한다. 그리고 되돌아보게 만든다. 어떠한 사랑도 기울어지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 불균형 때문에 남김없이 사랑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를 잃어버리면서 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