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 루이의 《에디의 끝》
“ㅇㅇㅇ가 게이라고?!”
“응, 남자를 좋아한데!”
“그래, 그럴 줄 알았어. 행동부터 이상했어.”
“에이, 진짜냐? 요즘 그런 사람들이 많대?”
“몰라, 근데 우리랑은 좀 다르잖아.”
과거 한 연예인이 커밍아웃을 했다는 기사를 접한 친구들의 반응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이성에 대한 관심도가 최고조였던 시절, 교실 안에서는 마치 금지된 주제를 다루듯 조용하고 은밀하게 가십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에서 묘한 불편함이 느껴졌다. 그때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삶을 난도질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었던 것 같다. 그럼 불편함에도 그들의 대화에 끼어있는 한 침묵으로만 일관할 수도 없었다. 어쩌면 나도 그와는 다른 성향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선을 그으려는 말 몇 마디 보탰을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그 순간의 불편함은 단지 다름에 대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 역시 언제든 같은 방식으로 타자화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결과였다. 남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은 언제나 타깃이 되었다. 그것이 교실의 질서였고, 더 넓게는 사회의 질서였다.
에두아르 루이는 《에디의 끝(En finir avec Eddy Bellegueule)》에서 이 경험을 훨씬 더 노골적이고 잔혹한 형태로 기록한다. 프랑스 북부의 작은 마을에서, 그는 목소리와 걸음걸이, 손짓 하나로 이미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그곳에서 ‘남자답지 않다’는 것은 곧 공동체 전체로부터 배제된다는 의미였다. 언어와 폭력, 침묵과 웃음 속에서 한 아이는 끝없이 타자로 밀려났다.
교실에서 경험했던 알 수 없는 불편감은 루이가 기록한 체험과 출발점을 같이 한다. 다수가 정해놓은 규칙 안에 서 있어야 한다. 누군가의 정체성 또한 스스로 결정하기 전에 이미 타인에 의해 규정된다. 그리고 다름을 대하는 시선은 폭력적이다.
루이가 태어난 피카르디(Picardie)는 프랑스 북부의 가난한 노동자 계급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공장 노동과 실업이 일상처럼 뒤섞여 있었고, 술집과 텔레비전이 유일한 즐길거리였다. 그곳에서 남성성은 폭력과 조롱을 통해 증명되었다. 아이들은 서로를 때리며 강함을 입증했고, 남자라면 여자를 욕하고, 축구 경기에 열광하며, 약자를 비웃어야 했다.
에디는 어릴 때부터 그 틀에 맞지 않았다. 목소리는 높고, 손짓은 섬세했다. 축구 대신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던 그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게이 새끼, 지지배 같다고 그를 모욕했고, 그의 이름조차 놀림감이 되었다. 에디 벨괼은 에서 벨괼(Bellegueule)은 프랑스어로 멋진, 아름다운이라는 의미의 Belle과 입, 혹은 얼굴이라는 의미의 Gueule이라는 단어가 합쳐진 형태였다. ‘예쁘장한 얼굴’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그의 이름은 성적 정체성과 맞물려 존재 전체를 조롱하는 낙인처럼 사용되었다.
가정 역시 피난처가 되지 못했다. 아버지는 가부장적 권위와 폭력으로 아들을 통제했다. 가난과 좌절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아버지는 남성성만이 살아남는 유일한 무기라고 믿었다. 아들이 남자답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모욕과 체벌을 주저하지 않았다. 어머니 역시 가난의 굴레 속에 묶여 있었고, 아들을 감싸지 못했다. 가정은 보호막이 아니라, 또 다른 감옥이었다.
그가 살던 동네 역시 선 긋기는 분명히 했다. 가난은 단순히 경제적 결핍이 아니라, 몸짓과 말투, 식습관과 옷차림에까지 새겨졌고, 그럼 그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이곳에서 도망쳐야 한다
도망쳐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는 스스로를 숨길 수밖에 없었다. 남성과 여성, 정상과 비정상, 강함과 약함을 구분하는 잣대는 너무도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선을 벗어나는 순간 집단의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에디의 끝》은 바로 이런 일상의 언어와 몸짓 속에 스며든 폭력을 기록하고 있다. 루이는 자신이 겪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의 기록은 한 개인의 삶을 지워버리는 사회적 구조를 보여준다. 특히 주목할만한 부분은 그 잔인함이 특정한 사건이나 한두 번의 차별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상의 모든 순간이 에디를 타자로 규정하는 장치로 작동했고, 일상은 곧 다른 세계로 도망쳐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로 가득 차 있었다.
에디가 느낀 억압은 단순히 '다르다'는 시선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곧 정체성의 전면적인 부정으로 이어졌다. 마을은 끊임없이 그에게 너는 남자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스스로의 몸짓과 목소리에 신경 쓰고, 자신이 여자아이와 어울릴 때 느끼던 편안한 감정을 부정하려 애썼다. 스스로의 욕망을 숨기고, 이웃들의 기대에 맞춰 남자다움을 흉내 내려했지만, 그 노력은 언제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그는 결국 마을을 떠나야만 적은 가능성이라도 열릴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서는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다는 절망이 그를 움직였다.
루이가 경험한 폭력과 배제는 프랑스 북부의 작은 마을이라는 특정한 공간에서 비롯되었지만, 그가 기록한 감각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결코 낯설지 않다. 유치원부터 시작되는 학벌, 지역, 성별, 부모와 가정환경과 더불어 심지어는 외모와 말투까지도 평가 기준이 된다.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너 사투리 엄청 귀엽다”라는 말이 사실은 무척 폭력적이라는 것에 동의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 말속에는 자신은 그 소수에 속하지 않았다는 전제에서 시작된 발언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너 영어 잘한다. 어디서 배웠어?”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불쾌할 수 있고, "Where are you from?"이 상황에 따라서는 인종 차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타자화가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삶을 농담거리로 소비해 버리는지도 모른다. 루이가 기록한 "나는 그들과 같지 않다"는 문장은, "나는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지 않는다"라는 누군가의 대답과 겹쳐 보이는 이유는 이 둘의 출발점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가부장적 질서,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이어지는 각종 낙인으로 스스로를 타자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사람들은 탈출을 염원하는지도 모른다. 마치 에디가 파리로 떠나는 순간을 기다려 온 것처럼, 사람들은 탈조선을 꿈꾼다. 그들의 염원은 간절하다. 단순히 사는 곳을 옮기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그를 옭아매던 낙인과 혐오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에디에게 탈출이 곧 정체성의 재발견을 의미했다면 사람들에게 이주는 스스로 선택한 삶을 만들어가는 시작인지도 모른다.
에디의 새로운 출발은 성공적이었다. 꽉 막힌 곳에서 벗어나 자신이 누구인지 묻고, 새로운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과거에는 숨겨야 했던 욕망과 언어가 다른 공간에서는 스스로를 설명하는 힘이 되었고, 떠남을 통해 감추려 했던 다름을 자기만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을 경험했다.
《에디의 끝》는 결국 한 개인이 어떻게 자신을 다시 쓰는가에 관한 기록이고, 사회가 만들어낸 폭력과 낙인을 드러내는 증언이면서 동시에 다른 세계를 향한 열망이 어떻게 문학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든 프랑스에서든, 누군가는 여전히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한다. 그 말은 도피가 아니라 자신을 증명하려는 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