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디오프의 《밤에는 모든 피가 검다》
나는 출근해면 자리에 앉아서 이메일을 확인하는 일을 가장 먼저 한다. 나를 찾는, 특히 회사에서 나에게 연락을 하는 이유는 궁금하거나, 부탁이 있거나, 혹은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문의 사항이야 그냥 확인해서 회신하면 되고, 요청 사항이야 검토해서 처리하면 되는 일이지만, 문제가 생겼다는 내용은 아침 시간의 흐름을 바꿔 놓을 만큼 무겁고 긴장된 기운을 동반한다.
한 번은 몇 개월동안 진행하던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겼다는 메일 때문에 긴급하게 회의가 소집된 적이 있다. 이미 협의가 끝난 사안에서 치.명.적.인. 오류가 발견된 것이다. 전반적인 스펙이 바뀌어야 할 만큼 중요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프로젝트는 이미 한참 진행된 후였다. 기존 스펙에 맞춰 개발하고, 테스트를 진행하고, 유관 부서에 변경에 대한 설명도 끝내 놓았던 상황이었다. 왜 이런 실수가 발생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되어야 했는지를 논의하던 중 이야기를 듣고 있던 ㅇㅇ상무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질문 뒤에 생략된 문장은 명확했다. 문제가 왜 발생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미 발생했고, 되돌릴 수 없다면, 덮어두고 지나가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의미였다.
어떤 시민이 정치인에게 “그 노란 리본은 그만 달고 나와주시면 안 될까요? 너무 많이 우려먹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단순히 개인적 피로감의 표현을 넘어선 어떤 사회적 감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행의 기억이 지나치게 오래 붙잡혀 있었다는 불편함, 그리고 지나간 과거는 묻어두려는 태도였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의 목소리가 기억되어야 할까? 장 프랑수아 빌라르(Jean-François Vilar)의 《바스티유 탱고(Bastille Tango)》의 관점을 빌리자면 무엇을 오래 붙잡고, 반대로 무엇을 놓아버릴지는 결코 중립적인 판단으로 선택되지 않는다. 의의로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조명받고, 그리고 다른 기억은 사라지게 된다.
우리나라에는 광복 이후에 겪었던 크고 작은 비극이 있다면, 프랑스에는 1,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절대적인 사건이 있다. 실제로 두 번의 전쟁은 프랑스 문학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한 세기를 관통하는 동안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프랑스 사회에 상처의 흔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프랑스 문학은 개인과 집단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언어로 옮기려는 시도 했다. 비극을 실행한 평범한 이들의 끔찍한 결정부터, 전쟁을 겪은 개인이 삶을 계속 이어나갈 수밖에 없는 시간, 비극을 경험한 세대와 뒤이어 등장한 세대 사이의 갈등과 허무주의적 세계관까지, 비극이 만든 공백과 침묵은 글로 기록되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프랑스 문학은 이처럼 전쟁을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정치적 힘, 그리고 그 힘 앞에서 사라져 간 개인들의 목소리를 다시 불러내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한국의 역사적 비극 속에서 잊혀진 개인의 삶을 다룬 대표적인 작품이 한강의 《소년이 온다》이었다면, 데이비드 디오프는 《밤에는 모든 피가 검다》라는 작품을 통해 1차 세계대전 속에서 소리 없이 희생된 서아프리카 병사들의 목소리를 되살려냈다.
나는 안다. 나는 알고 있다. 난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나, 알파 니아이시, 노인의 아들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중략)... 아! 마델바 디옵, 내 형제보다 가까운 그는 너무 긴 시간 동 안 죽이 갔다. 아침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그리고 다시 해 질 너까지. 그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중략)... 백정의 칼에 회생된 후 해체된 양처럼, 그는 떨고 있었다. 다른 동료들이 참호라 부르는 땅의 갈라진 상처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동안, 나는 마뎀바 옆에 누운 채 머물러 있었다. 그는 왼손으로 내 오른손을 꽉 쥐고 있었고, 내 시선은 포화의 흔적으로 얼룩져 차갑게 식어가는 푸른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 세 번에 걸쳐 자신을 죽여달라 부탁했고, 나 는 세 번 모두 거절했다. ...(중략)... 그의 머리는 나를 향했고, 나의 오른손은 그의 왼손을 쥐고 있었다.
소설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알파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그는 형제 같은 마뎀바가 죽어가는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 마뎀바는 독일군의 창검에 배를 찔린 채 참호로 돌아왔고, 고통에 시달리던 마뎀바는 알파에게 자신의 고통을 끝내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알파는 세 번의 요청에도 끝내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참호 속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며 천천히 죽어갔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보던 알파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광기뿐이었다.
이후 알파는 전투가 이어지는 밤마다 독일 병사를 한 명씩 사냥하듯 붙잡아 배를 가르고, 고통에 허덕이며 마뎀바와 같은 부탁을 하는 그들에게 자비를 선사하듯 죽음을 선사했다. 그리고 그는 마뎀바를 위한 전리품처럼 오른손과 총을 들고 참호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처음 그의 용기는 추앙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일곱 번째 손을 들고 돌아오던 순간, 그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 그는 후방의 병원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소설이 진행될수록 이 이야기가 전체가 누구의 기억을 바탕으로 이어지고 있는지가 불분명해진다. 후방 병원, 의사의 집, 묻힌 손들, 아프리카의 전설이 겹쳐지면서 알파의 이야기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인지, 헷갈리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아프리카에서 착출 된 병사, 프랑스어로 하달된 명령, 그리고 남겨진 기록들은 당시 전쟁을 수행해야 했던 식민지 출신 군인들의 현실을 고증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점차 기억의 정치학과 결을 같이 한다. 전쟁의 기억은 누구의 언어로, 그리고 누구의 기록으로 남아 있는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 참호 속에 있던 병사 수, 그들의 전과, 탄약의 수와 전력의 손실 같은 정보들은 숫자로 집계되어 상부로 올라갔지만, 죽어가던 동료의 숨소리, 고통에 몸부림치던 그의 눈빛, 그리고 그의 마지막 부탁은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숫자로 기억되는 사회에서 매일 아침 이메일함을 정리하듯, 우리도 기억을 분류하고 덮어두기를 반복한다. 일부는 숫자로만, 일부는 결과로, 또 일부는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묻힌다. 늘 이렇게 지워지는 선택에 누군가의 아픈 기억은 포함되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그 비극을 들추어내고 악용하는 일도 없어야겠다.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로가 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소년이 온다》의 마지막 문장을 무척 좋아한다. 비추고 밝히고 드러내서 힘껏 아파하고 치유하는 방식은 최소한 아름답다.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 한강의 《소년이 온다》 중에서...
※이미지: 르네 마그리트의 〈기억〉, 194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