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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도, 용서하지도 않는 파리의 벽

《Bastille Tango》 by Jean-François Vilar

by 프렌치 북스토어

파리의 벽에는 오래된 문장들이 남아 있다. 다만 그것들은 완전한 문장도, 간결한 메시지도 아닌 형태로, 대부분은 찢겨 나가거나 덧칠되어 절반쯤 사라진 채, 말하려다 만 언어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그 미완의 언어는 때때로, 더 큰 울림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Ni oubli,
ni pardon.


파리에서 한쪽 벽에 남아 있는 오래된 낙서에 눈길을 주는 사람들은 드물다. 그 의미를 아는 모르는 사람들은 낯선 단어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기 때문이고, 그 뜻을 아는 이들조차 그 깊이를 곱씹기에 일상은 너무 바쁘다.


하지만 장 프랑수아 빌라르(Jean-François Vilar)의 시선은 거기서 멈춰 섰다. "잊지도 않을 것이고, 용서하지도 않겠다(ni oubli, ni pardon)" 이 짧은 단어들 속에는 시대를 관통하는 분노, 침묵 속에 방치된 죽음, 그리고 그 너머에 말할 수 없는 진실이 깃들어 있다.


그의 작품 《바스티유 탱고(Bastille Tango)》 속 사진작가 빅토르(Victor)는 도시를 찍고 있다. 그는 바스티유 광장 주변에서 고문당한 남자를 묘사한 포스터들이 붙이는 남성, 오스카(Oscar)를 발견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빅토르는 이 포스터들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파리에 거주하는 아르헨티나 망명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한다.


소설 속 빅토르는 벽에 붙은 포스터를 찍고 있었지만 사실 벽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포스터 위에 덧붙은 포스터, 그리고 그 아래 가려진 문장, 낡은 신문지 조각, 잉크가 번져 흐릿해진 구호, 사라진 얼굴 옆에 적힌 이름 없는 날짜가 남아 있는 벽은 기억의 보관소였고 지워지지 않는 기록으로 겹겹이 쌓인 도시의 책장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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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바라보았던 파리는 여전히 1968년에 멈추어 있다. 당시 파리의 언어들은 그림자 밑에 존재했다. 그 말들은 벽에 드리워졌고 사람들을 그걸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들은 소리 내 않았다. 말하지 않았고,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었다. 표현하고 있었고, 고요하게 외치는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작품 속 주인공은 카메라를 목에 걸고 그런 파리의 벽을 유심히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셔터를 눌렀다. 그가 담아내는 것은 기억의 파편이었고, 파리라는 도시가 과거를 지우는 척하면서도 끝내 지우지 못한 잔해물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기억은 늘 의식적인 형태로 남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사진 프레임 안에 기록하게 만들었다. 기억은 때로는 그것이 조각나고, 겹쳐지고, 지워질 듯 말 듯한 모습으로 존재하기도 했다. 마치 작품 속 파리처럼 기억의 단편들은 도시 곳곳에 흩어져 그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벽에 붙은 흔한 포스터 하나를 유심히 살펴본다. 그 아래는 또 다른 포스터의 찢긴 귀퉁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시간의 층이 고스란히 겹쳐진 모습이 오래된 투쟁의 구호 위에서 새로운 기억이 붙여졌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처음 붙었던 포스터 위에 문화 공연 포스터가 겹쳐지고, 다시 상업 광고가 덧입혀진다. 아무도 지우지 않았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된 적도 없다. 파리의 벽은 기억을 지우는 법을 모른다.


빅토르는 그런 도시에서 사라진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어쩌면 사라질 수 없었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단서를 찾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렌즈 프레임에 들어온 포스터 조각 하나가, 또 다른 시대, 누군가의 이야기들을 불러오는 듯했다.


파리의 진짜 기억은 거리의 벽에 있다. 골목에 남아 있고, 누군가의 이름이 흐릿하게 남은 벽돌 틈 사이에 존재한다. 그 어디에도 기억이라는 표시는 없지만, 그 모든 장소는 누군가에게 잊을 수 없는 순간이 깃든 장소로 기억된다.


벽은 말이 없다. 마치 과거 파리가 그랬던 것처럼 고요하다. 그러나 그 침묵을 바라보는 이들은 결코 고요할 수 없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더 큰 울림으로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들이 아직 거기에 붙어 있다.


작품 속 인물들은 그 침묵 속을 걷는다. 카메라 셔터 소리조차 삼켜질 듯한 고요한 파리의 골목에서 말 대신 벽을 기억한다. 사진을 찍지만, 그것은 기록이 아니라 청취에 더 가깝다. 도시가 직접 말하지 않는 이야기들, 포스터가 지워진 후에도 남은 얼룩들, 이름이 사라진 자리의 공기, 그리고 그 누구도 말해지지 않으려 했던 사실을 떠올린다.


어떠한 진실은 말해질 수 없다. 아니 말해지지 않는다. 너무나도 많은 이유로 지워진 사람들이 지워졌다. 그들의 고요한 침묵은 들리지 않기 때문에 더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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