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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이방인》에서 등장한 아랍인의 이야기

카멜 다우드의 《뫼르소, 살인 사건》

by 프렌치 북스토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처음 읽었을 때, 가장 공감할 수 없었던 것은 뫼르소의 무심함이었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행동 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무감각할 수가 있을까? 그의 소시오패스적 성향이 서늘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유명한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카뮈의 《이방인》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부 마지막에 있는 뫼르소가 아랍인을 총으로 살해하는 장면이다. 그는 어머니의 장례식이 있고 얼마 후 친구 레이몽과 여자친구 마리와 함께 마송에 있는 해변으로 놀러 가게 된다.


사건은 레이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해변에서 과거 사귀던 아랍인 여자친구의 지인들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그들은 과거 여자친구에게 폭력적으로 행동한 레이몽을 못마땅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그들은 레이몽과 싸움이 벌어지게 된다. 짧은 다툼이었지만 레이몽은 칼에 찔리게 되는 부상을 입게 되고, 뫼르소는 자연스럽게 레이몽의 총을 건네받게 된다.


사건이 있은 후 뫼르소는 다시 해변을 따라 혼자 걷기로 한다. 그리고 잠시 후 뫼르소는 바위 뒤에서 손에 칼을 들고 있던 한 남성 아랍인과 마주치게 된다. 뜨거운 바람, 태양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햇빛은 칼날 위로 반사되었고, 반사된 빛은 뫼르소의 눈을 찔렀다. 그리고 그의 주머니에는 레이몽의 총이 들어 있었다.


그 순간, 뫼르소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손에 쥔 권총을 뽑아 방아쇠를 당기는 선택을 한 것이다. 첫 번째 격발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 아랍인은 모래 위로 쓰러지고 만다. 하지만 뫼르소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불행의 문을 두드린 네 번의 짧은 노크가 이어졌다. 이어서 그를 향해 네 발을 더 쏘고 만 것이다.


놀랍게도 소설은 서사의 중심에 있는 이 사건에서 총을 맞고 쓰러진 아랍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저 아랍인으로만 등장한 그가 레이몽을 킬로 찌른 아랍인이었는지도 불분명하다. 뫼르소는 그를 향해 방아쇠는 다섯 번이나 당겨졌지만, 단 한 번도 그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이어지는 재판 과정에서조차 그는 아랍인이라고 불릴 뿐이다. 작품의 시선은 철저히 뫼르소를 향해 있다. 그가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았다는 사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닷가로 놀러 갔다는 그의 행동만을 가지고 죄의 경중을 따지게 된다. 그렇게 피해자는 완벽하게 외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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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멜 다우드의 《뫼르소, 살인 사건》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카뮈가 끝내 이름을 주지 않았던 아랍인에게 '무사(Moussa)'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의 서사를 만들어 냈다. 작품은 무사의 동생 아르 하룬이 알제리의 한 술집에서 젊은 기자에게 자신과 형제의 이야기를 길게 털어놓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하룬의 입장에서 바라본 사건은 끔찍했다. 뫼르소의 총에 맞아 쓰러진 것은 한 이름 없는 아랍인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연인이었고, 한 어머니의 아들이었고, 또 자신의 형이었던 개인의 상실이었다. 다우드의 작품은 그렇게 삭제된 존재를 조명하면서 무사가 살아온 삶과 죽음 이후 남겨진 이들의 아픔을 그려냈다.


힘 있는 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소외된 이들의 침묵

지금 생각해 보면 사건에는 상당한 우연적 요소가 존재한다. 왜 아랍인이었을까? 그것도 알제리 해변에서. 그리고 뫼르소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을까? 어쩌면 재판에 참여했던 모두가 살해당한 그가 누구였는지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침묵은 언제나 권력과 맞닿아 있다. 누군가가 목소리를 잃는다는 것은, 그의 발언이 애초부터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식민지 알제리에서 프랑스어로 쓰인 카뮈의 문장은 아랍인의 이름과 목소리를 (어쩌면 의도적으로) 삭제함으로써, 당시 사회적 구조를 고스란히 드러내려고 했었는지도 모른다. 뫼르소의 부조리함에 식민 사회의 부조리함의 고발일지도 모른다.


문학의 언어조차 권력에 종속될 수 있다는 사실은 불편한 각성을 남긴다. 물론 이러한 침묵은 문학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의견이 묵살당하고, 기록조차 되지 않은 채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기록할 대상을 선택하는 작업이지만, 동시에 기록하지 않을 것을 배제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에는 사회적 질서가 녹아있고, 종종 시대적 정의를 반영하는 경우가 흔하다. 과거처럼 직접적인 검열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대중적 취향과 사회적 분위기는 어떤 목소리가 드러나고 어떤 목소리가 침묵당하는지를 결정한다.


그럼에도 프랑스 문학의 특별함은 이 질서에 딴지를 거는 작품들이 언제나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 사회는 그 선 넘는 시선을 제법 잘 수용해 왔다. 그리고 이 작품은 2015년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이렇게 보면 공쿠르상은 시대적 흐름에 맞춰 가장 잘 딴지를 거는 작품을 특히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인의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한 아랍인의 서사를 복원하는 작업은 집단적 상흔의 회복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작품 속에 무명으로 존재했던 이에게 이름을 되찾아주는 행위는 문학이 단지 미학적 형식이 아니라 사회적 정의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받아들여졌다.


프랑스 식민 시대, 알제리 사회에서 개인의 죽음에 누가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 이름조차 입에 오르지 않을 정도로 무시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 속 아랍인에게 이름과 서사를 부여한 시도는 당시 낼 수 없었던 알제리 전체의 목소리를 되살려내는 작업이었다.


또 무사의 서사가 단순히 과거 성공한 작품의 속편 정도로 치부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서사가 기존 작품의 가치를 훼손하거나, 작가의 시선을 비난하거나, 절대적인 피해자의 시선에서 작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뮈의 작품과 나란히 또 하나의 서사를 병치함으로써 두 작품이 서로 충돌하면서도 대화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다우드의 《뫼르소, 살인 사건》가 지니는 진정한 의미는 한 시대의 권력에 의해 지워진 자리를 다시 불러내는 힘에 있다. 이름 없이 사라졌던 존재를 무사라는 한 개인으로 되살려냄으로써, 소설은 침묵 속에 남겨진 목소리를 복원하는 증언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불러내야 할 이름들은 우리 주변에도 많다. 길 위에, 미디어에,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배경으로, 어쩌면 보이지 않는 곳에 언제나 존재해 왔다. 이 모두를 돌아볼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그 존재만큼은 외면하지 않았으면 한다. 지금 내가 누리는 이 편안함 뒤에는 누군가의 조용한 서사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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