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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서'와 '가족이기 때문에' 그 사이

클라라 뒤퐁-모노의 《사라지지 않는다》

by 프렌치 북스토어

가족 안에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감정들이 존재한다. 어쩌면 '가족 안에서도'라고 표현하는 게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들 사이에서 뱉어내어지지 못한 감정은 더 강렬하고 오래 남기 마련이다.


우리들은 ‘가족이라서’와 ‘가족이기 때문에’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가족이기 때문에 많은 말들 내뱉지만, 가족이라서 정작 중요한 감정은 생략해버리고 만다. 불편함, 질투, 죄책감, 어쩌면 기억나지도 않는 순간들, 반대로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아픔들까지, 다양한 이유로 혀 끝에서 맴돌다가 결국 다시 삼켜버리고 만다.


그리고 같은 것에 기대를 건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모두들 그렇게 믿고 싶지만, 눌러 두었던 감정들은 결코 스스로 사그라지는 법이 없다. 다만 그 기억이 삶의 풍경으로 스며들면서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워 질뿐, 오래된 상처도 건드리면 아프다.


가족 안에서 가장 먼저 무게를 짊어지는 이는 늘 첫째이다. 몇 살 먹지도 않은 존재가 자신보다 어린 동생들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보호의 의무와 어른스러움의 부담을 짊어진다. 그들이 받는 기대, 어쩌면 부모님께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은 그들이 첫째이기 때문에 누리는 특권의 무게이기도 하다.

맏이, 첫째는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가장 외면이 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할 나이부터 그들은 혼자가 되는 방법을 배운다. 첫째는 혼자 옷을 입고, 양치를 하고, 스스로 잠자리에 드는 법을 안다. 그들은 부모의 시선이 동생을 향하는 순간을 잽싸게 알아차리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내어준다. 늘 잘해야 하는 아이, 양보와 선행의 냄새가 몸에 배어버린 이들은 언제나 칭찬에 목마르다.


반면 둘째는 다른 방식으로 침묵을 견딘다. 그들은 희생 대신, 분노로 반응한다. 특히 동생이 태어나는 순간 집안에서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둘째이다. 집안의 공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가장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이제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음에 시기하고 분노한다. 그들은 말버릇처럼 왜 아무도 나를 봐주지 않느냐고 묻는다. 물음 같은 원망의 목소리를 새로 태어난 동생을 향한 말이고, 그들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 갔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드러내기란 불가능하다. 분명 부모가 자기만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또 동생에게 더 많은 케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자기감정만을 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안다. 그럼에도 생활에서 문득 쏟아지는 상실감과 시기심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럴 때면 둘째는 화를 누그러뜨리는 자기만의 방법을 찾게 되고, 그 방법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막내. 그들은 이미 짜인 질서에 반대하는 일이 없다. 질문하지도 하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그래왔고, 또 그래야 하는 것처럼 받아들인다. 오히려 지금 이 질서에 더 잘 적응하는 쪽을 택한다. 사람들을 위로하는 방법을 배우고, 즐거움을 주거나, 귀여움을 받는 방법을 터득한다. 그렇게 막내는 다른 형제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공존하는 방법을 체득하고, 자신만의 자리를 찾아낸다.





이러한 침묵은 프랑스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특히 아픈 동생을 돌봐야 하는 부모와 함께 있는 아이들은 더욱 진한 감정을 삼킬 수밖에 없다. 클라라 뒤퐁-모노(Clara Dupont-Monod)의 소설 《사라지지 않는다(s’adapter)》는 장애를 갖고 태어난 한 아이를 중심에 두고, 보이는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간다. 유전적 질환을 안고 태어난 아이,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한 과정을 따라갈 수 없었던 존재, 이런 아이를 두고, 첫째(형)와 둘째(누이)는 자신만의 진한 감정을 삼킨다.


이야기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째, 형의 시선, 둘째 누이의 시선, 그리고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아픈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막내의 눈으로 가족을 바라본다.


첫째는 태어난 아픈 동생을 사랑과 헌신을 보살핀다. 아픈 동생 곁에서 끊임없이 돌보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만다. 어린 동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첫째가 느끼는 감정은 더 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동생을 잊지 못한다.


둘째는 정반대의 감정선을 보여준다. 그녀는 동생이 아프기 때문에 시기하고 미워한다. 동생이 아프지 않았다면 부모가 자신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그녀를 화나게 만들었다. 둘째는 어리고 아픈 동생을 마주할 때마다 두려움과 함께 이유 모를 불편함을 느껴야 했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지만, 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알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 않았다. 그리고 분노는 결국 가족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내가 태어날 수 있었을까?

막내는 동생이 이미 세상을 떠난 뒤에 태어난다. 그는 부재를 통해 또 다른 형제를 배운다. 사진 속에서만 존재하는 아이, 가족의 대화 속에서만 남아 있는 이름을 통해 자신 이전의 서사를 감지해 낸다. 그는 자기 이전에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된다.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내가 태어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꼬리표가 되어 막내 뒤를 따라다니게 된다.


하지만 한 가지 신선한 부분은 소설에 부모의 시선이 없다는 점이다. 부모는 자신들의 입으로 그들의 비참함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철저하게 제3자가 되어 조연으로 아이들의 세상에 존재할 뿐이다.


부모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적응은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냉장고에 붙은 달력에는 병원 진료와 재활 시간이 색으로 구분되어 있고, 약봉지에는 아침·점심·저녁이라는 스티커가 붙었다. 식탁 위에는 물컵과 수건이 쌓여갔고, 그들의 생활은 변해갔다. 아이들은 이 모든 변화에 적응해 나갔다. 첫째는 귀로 동생의 호흡 리듬을 확인하는 습관부터 시작했다. 둘째는 알람 시계를 이용해서 스트레칭 시간을 까먹지 않는 방법을 배웠다. 외출은 이동 시간과 화장실의 위치, 그리고 접근성을 먼저 계산한 뒤에야 이루어졌다. 이 모든 과정에 ‘함께 하는 것(faire avec)’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 눈앞에 있는 상황을 부정하거나 애써 극복하려 하지 않고, 현실을 끌어안고, 함께 살아갈 모습으로 조금씩 적응해 나가는 것이다.


어느 순간 일상의 모든 것이 개선, 극복, 변화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이 왜 문제가 하나 줄어든 모습이어야 할까?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모든 것을 극복할 필요는 없다. 적응해 버리는 것이 오히려 행복을 보장하는 더 빠른 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가끔은 슬픔도 적응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첫째는 방 한쪽에 남겨진 담요와 작은 장난감을 치우지 않았다. 매주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그 앞에 잠깐, 아주 잠깐 앉았다가 일어난다. 그 안에 있는 슬픔과 마주하는 아주 짧은 시간, 그는 그 슬픔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은 중이었다. 슬픔에 적응하는 그만의 방식으로.


둘째는 분노가 치밀 때마다 공책을 꺼낸다. 말하지 못한 감정을 글로 적기 위해서다. 그녀에게 쌓이는 종이는 감정의 압력을 흡수하는 완충재가 같은 역할을 했다. 부모는 더 이상 기념일을 소란스럽게 기념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한 케이크 위에 하나의 빈자리(촛불을 꽂지 않는 칸)를 남긴다. 누구도 말하지 않지만, 그 작은 조각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고 있다.


그들은 슬픔을 밀어내지도, 전시하지도 않는다. 슬픔을 그저 일상의 영역에 배치해 둘 뿐이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에는 언제나 그만큼의 무게가 있다. 드러나지 않은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오래, 더 깊게 남아 삶의 리듬을 바꾼다. 질투는 돌봄과 사랑의 과잉으로, 수치심은 방어의 언어로, 죄책감은 습관과 선택이라는 방식으로 변형되어 그들의 안에 머물렀다.


프랑스 고등학생들은 왜 이 작품을 좋은 소설이라고 평가했을까? 아마도 작품이 특별한 가족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동시에 누구나 겪는 감정의 풍경을 솔직하게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질투, 수치, 죄책감 같은 감정은 흔히 숨기거나 부끄럽다고 여겨지지만, 이 소설은 그것들이야말로 우리를 구성하는 일부라고 말한다. 자기감정과 싸우고, 설명되지 않는 불안을 견뎌야 하는 시기, 말할 수 없는 감정을 품고 살아가는 그들에게 건네는 위로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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