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은 본능이 아니라 학습된 결과라고 주장하는 작가, 엘리자베스 바딩테르
부모라면 한 번쯤 사랑이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아이는 바라만 보고 있어도 즐겁고, 나를 바라만 봐줘도 웃음이 나는 존재이다. 아이와 함께 웃고, 떠드는 시간이 아까울 만큼 소중하게 느껴지고, 아이에게 일어나는 작고 사소한 변화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느끼게 된다. 뭐라고 딱 잘라서 설명할 수 없지만, 부모가 느끼게 되는 무척이나 신비로운 순간, 그리고 그때의 감정을 우리는 모성애 혹은 부성애라고 부른다.
우리는 오랫동안 모성애를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아이를 돌보고 사랑하고 보살피는 감정은 여성이라면 모두가 타고난 것처럼 본성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모성애는 강도 높은 노동과 희생을 강요하지만 그만큼 존귀하고 고결한 것으로 취급되어 왔다. 내가 어렸을 때는 기차에 치일 위험에 놓인 아이를 구하고 자신을 목숨까지 희생하는 선택이 대표적인 모성애의 모습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보다 이전에는 아이를 둘로 가르는 것을 차마 선택할 수 없어 자신의 결백을 포기하고 자신의 고통을 선택하는 것이 진정한 어머니의 모습이라고 성경에서는 말하고 있다.
아마 지금도 많은 이들이 모성애를 타고난 본능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주변에서 말하는 그 가치를 넘겨두고서라도 바라만 봐도 사랑스러운 아이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이 사회적으로 학습된 결과라는 주장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엘리자베스 바딩테르는 현대 프랑스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 명이다. 그녀의 작품과 철학적 사상은 여성주의, 양성 평등, 자유주의를 넘어 다양한 사회 및 문화적 논의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녀는 특히 여성의 역할과 모성에 대한 전통적인 시선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의 작품들에서는 성별과 성 정체성이 성별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임에 기초를 둔다. 전통적이고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성별을 접근하고 해석하는 것은 이분법적이고 다양성이나 유연성면에서 많은 허점을 안고 있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여성이 느끼는 모성조차 사회/문화적 요인에 의해 형성된 고정관념이라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모성애에 대한 기대와 여성의 무조건적인 희생을 비판한다. 엘리자베스 바딩테르는 이러한 사회적 기대가 성별에 기반한 차별을 야기시킨다고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정관념에서 벗어남으로써 여성과 남성 사이의 평등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는 방법으로 여겨진다.
그녀의 작품 세계는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와 현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이 어우러져 있다. 그녀의 저서들은 페미니즘 이론과 사회적 논의에 큰 기여를 해왔다.
그녀의 대표작 《갈등, 여자와 어머니》(원제 : Le conflit, la femme et la mère)는 성 정체성과 성 역할에 대한 사회적 견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과 성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을 담고 있다. 작품은 성별의 이분법적인 접근을 넘어서는 보다 유연한 성 정체성의 이해에 초점을 맞춘다.
책은 세 가지 주요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부분은 모성 개념의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까지의 성 역할의 진화를 추적한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여성에게 부여된 기대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갈등을 탐구하고, 마지막으로 여성이 이러한 기대에 저항하고 도전함으로써 얻게 되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서 다룬다.
책은 모성이란 역사적, 문화적 힘에 의해 형성된 사회적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모성과 관련하여 여성에게 부여된 기대는 종종 스스로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수단으로 이어져 왔다고 분석한다. 그녀는 이러한 기대가 여성의 자율성을 침해한다고 말한다. 자연주의는 어머니의 역할을 이상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동시에 모유 수유, 자연 출산, 아이와의 지속적인 접촉과 같은 관행을 과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강조하면서 모성이라는 가치를 부각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여성들은 스스로의 자유를 잃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녀는 이러한 트렌드가 여성에게 과도한 부담을 전가하고, 여성의 자유와 전문적 발전을 제한할 수 있다는 말한다.
이러한 모성애의 남다른 견해는 그녀의 또 다른 작품 《더 사랑해》(원제: L'amour en plus)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녀의 초기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어머니성에 대한 사회적 기대와 그 기대가 여성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비판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작품에서 모성애는 본능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학습된 개념임을 설명한다. 그 과정에서 엘리자베스 바딩테르는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자신들의 조건에 맞게 재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책은 17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서구 사회에서 모성애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설명하면서 시작한다. 그녀는 특히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모성애가 어떻게 재정의되었는지, 그리고 산업혁명이 여성과 가족에 대한 기대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를 지적한다. 엘리자베스 바딩테르는 다양한 역사적 문헌과 문학 작품을 인용하면서, 모성애가 항상 여성에게 내재된 본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한다. 모성애는 특정 사회적, 경제적 조건 하에서 강조되거나 무시될 수 있는 문화적 구성물임을 뜻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녀는 일부 시대와 문화에서 여성들은 좋은 어머니가 되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아이를 돌보는 일보다 자신들의 사회적 역할에 더 가치를 두는 사례를 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현대 여성들은 모성애 때문에 느껴야 하는 죄책감은 비판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엘리자베스 바딩테르는 특히 산업화 시대에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좋은 어머니'가 되기를 요구받았다고 분석하고 있다. 동시에 이는 여성의 자유와 개인적 발전을 제한하는 요소로 작용했다고 지적한다. 이 시기에 여성의 역할이 가정 내에서 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면서, 여성의 개인적인 욕구와 직업적 성취는 종종 우선시 되지 못했고, 자녀 양육이라는 과업을 위해 자신들의 개인적 성취는 포기되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고 설명한다.
책은 모성애를 둘러싼 로맨틱한 이상과 신화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여성이 어머니로서의 역할 외에 다양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음에 초점을 두고 모성애 또한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모성애가 여성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통념에 의문을 제기함과 동시에 이러한 신화가 여성의 사회적, 직업적 기회를 제한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녀의 작품 중에는 남녀의 사랑에 대한 견해를 엿볼 수 있는 책도 있다. 《하나는 다른 것》(원제 : L'un est l'autre)에서 엘리자베스 바딩테르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와 성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답한다. 그녀는 책에서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이 역사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이러한 역할들이 자연적이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의 결과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책에서는 산업혁명을 통해 성 역할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 과정에서 남성은 공장과 사무실로 출근하는 반면, 여성은 가정을 돌보는 역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역할이 분담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경제적 활동이 가정 외부로 이동함에 따라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더욱 분리되고, 성별에 따른 노동 분배가 고착화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분석한다.
또한 계몽주의 시대에는 여성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지만, 이 교육은 주로 가정을 이끌고 아이를 키우는 데 필요한 기술에 중점을 두었다고 지적한다. 특히 여성의 지적 발전보다는 도덕성과 가정적 덕목을 강조하는 방향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여성은 법적으로도 많은 제한을 받았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결혼, 재산권, 보호권 등 여러 면에서 남성의 의존하에 놓이게 되었고, 이는 여성의 자율성과 사회적 활동에 큰 제약을 가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성별에 따른 역할과 기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회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강조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한다. 여성에게 기대되는 엄마로서의 역할은 많은 문화에서 중요하게 여겨지지만, 이는 생물학적 필연성보다는 문화적, 사회적 합의의 결과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페미니즘 운동과 여성의 권리 향상을 위한 다양한 사회적 운동이 등장했다. 이러한 운동은 여성이 교육, 경제, 정치 등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남성과 동등한 기회를 갖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지만 모성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는 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성 역할은 직업 선택, 가정 내 역할, 성 정체성 및 표현의 자유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변화는 개인의 자유와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노력의 일환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바딩테르는 개인이 사회적으로 부여된 성 역할에 구속되지 않고 자신의 개성과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교육과 법적, 경제적 구조에서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녀는 더 유연하고 유동적인 성 역할이 개인의 복지와 사회적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남성과 여성이 전통적인 성 역할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역할과 책임을 수행할 수 있을 때, 더욱 건강하고 조화로운 사회가 형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엘리자베스 바딩테르의 이러한 주장은 여성들이 어머니로서 느끼는 압력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론적 근거와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로 인해 많은 여성들은 자신의 역할을 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이 본능적인 것이 아니라는 그녀의 견해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러한 관점이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본능적인 유대를 과소평가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대한 그녀의 비판적 시각이 여성들에게 양육에 대한 죄책감을 줄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녀는 여성의 자유와 선택권을 강조하지만,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그녀의 접근 방식이 특정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진 여성들의 경험을 일반화한다고 비판한다. 그녀의 이론이 실제로 여성들 사이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완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 한다.
성 정체성과 성 역할에 대한 견해도 성별의 이분법적 해석을 해체하려는 시도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면서도, 동시에 일부에서는 그녀의 접근 방식이 성별의 생물학적 기초를 과도하게 무시한다고 비판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성 정체성에 대한 더 복잡한 생물학적, 사회적 요인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는 지적에서 비롯된다.
다양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바딩테르의 모성애에 대한 견해는 프랑스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영향을 미쳤다. 여성으로서 느껴야 하는 육아에 대한 부담과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단적인 예로 프랑스 엄마들은 3개월이 지났을 때부터 아이를 보육원에 보낼 수 있다. 또한, 미용의 이유로 모유 수유를 거부하고, 동시에 모유 수유를 선택한 엄마들은 공공장소에서 모유 수유의 권리를 갖는다.
이러한 선택의 폭을 넓히고 부담과 강요의 폭을 줄임으로써 가정 내에서의 여성의 역할, 모성애, 그리고 가족 내에서 언제나 희생하는 전통적인 어머니상의 이미지는 대부분 사라졌다. 비록 여전히 여성이 가족들을 위해서 식사를 준비하고, 젖을 물리고, 아이들과 더 오랜 시간을 보낸다 하더라도 이러한 노동이 의무가 아니라는 사실과 무조건적인 희생 이외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여성이기 때문에 느끼는 죄책감과 피로감은 몰라보게 줄었다고 말한다. 물론 이러한 변화에는 환경적 변화도 함께 수반하고 있다. 100일이 된 아이를 돌볼 수 있는 보육원이나 개인 보모를 지원받을 수 있고, 슈퍼마켓에는 아이들을 위한 음식을 손쉽게 구매할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재고하고 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어머니 역할을 선택한다.
엘리자베스 바딩테르의 삶과 철학은 단지 여성에게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만의 깊은 철학적 사유와 문화적 분석은 페미니즘, 양성 평등, 모성애를 뛰어넘어 인간의 자유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를 촉발시켰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개인의 자율성과 선택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사회적 변화를 끊임없이 추구해 왔다.
그녀가 쏘아 올린 작은 불씨는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프랑스에서 육아를 해보면 더욱 느끼게 된다. 간혹 프랑스에서 육아를 하고 있다고 밝히면 열에 아홉은 복지와 혜택에 대해 묻는다. 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지원을 해주고, 양육에 드는 경제적 비용에만 관심을 갖는다. 나는 비슷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대로 아이를 키울 수 있어서 너무 편하다고 대답한다. 100일을 갓 넘긴 아기를 맡길 수 있고, 5살이 된 아이가 공갈 젖꼭지를 물고 다녀도 뭐라고 하는 사람 없고, 유치원에 기저귀를 차고가도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2살 아이와 핫초코를 즐기는 낭만을 누릴 수 있어서 좋다고 말이다.
엘리자베스 바딩테르의 작품과 사상은 현대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이 직면한 문제를 조명한다. 특히 모성애에 대해서 집중해서 이야기했지만, 그녀의 글을 읽으면서 현재 우리가 느끼고 있는 좋은 부모상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데 몇 억을 써야 하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눈치를 봐야 하는 사회. 돼지맘이라고 (속으로 혹은 자판으로) 욕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받은 정보를 활용하고 그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곳. 어쩌면 최소한 아이에게 원망받지 않는 방법이라고 좋은 어머니상에 부합하기 위해 스스로를 위로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쉬움을 느낀다.
엘리자베스 바딩테르가 프랑스 사회에 남긴 유산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될 수도 있다.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개인에게 부과되는 지나친 부담과 책임감, 그로 일해 감내해야 하는 고단함과 죄책감은 삶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앗아가 버렸다. 좋은 어머니상, 과거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모성애가 아이를 낳을 권리도, 또 낳지 않을 권리도 빼앗아가 버렸다. 모성애가 우리의 행복을 망치고 있다. 아이를 자유롭게 사랑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양육할 수 있는 선택이 존중받는 날이 오길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