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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영전화 가 귀띔해 준 시집의 비밀

곰 같은 며느리, 허경영전화 덕에 여우같이 복수의 칼을 갈다


전화 자동응답 시스템(ARS)을 통해 자신의 지지율을 높이고 투표를 독려하기 위해 국가 혁명당의 대선후보 허경영이 돌리는 전화가 요즘 이슈다.

허경영 측은 지상파나 대선후보 조사 등에서 자신이 전혀 언급되지 않기에 그저 자비로 스스로를 알릴 목적으로 합법적 전화안내방식을 고집했고 밝혔다. 하지만 시민의 불편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 역효과가 나면서 이제 더 이상의 전화 홍보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에게도 이 전화가 왔지만 받지는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울려와 거절만 당하는 이 전화가 이제 울리지 않을 것이란 소식을 접하니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나에게는 유의미한 전화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남편에게도 이 전화가 왔다.

퇴근 후에도 회사에서 급한 전화가 자주 오기에 화장실에 있는 남편을 대신에 전화를 받아야 했다. 주방에서 남편 방으로 향하느라 주인 찾는 전화벨이 몇 번 더 울렸고 고무장갑을 빼고 받자 전화는 끊겼다. 발신을 보니 바로 허경영의 전화였다. 피식 웃음이 났다.

전화기를 책상에 놓으려는데 최근 통화 기록에 시어머니의 전화와 문자 내역이 많았다. 며칠 전 남편과 시어머니의 수상쩍은 통화가 떠올랐다.


"은영이 옆에 있나?"

시어머니는 남편에게 다짜고짜  나의 유무를 물으셨다.

"아, 아니요."

남편은 내 옆을 떠나 방으로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한참 후 통화가 종료되었다.

나는 남편에게 먼저 말을 꺼내었다.

"어머니 요즘 장사도 안되고 도련님 월급 주려면 힘드실 텐데, 부모가 자식에게 먼저 말하기 힘들 테니까, 오빠가 먼저 물어봐."

"그거 아니야. 알아서 할게."

남편은 일 때문에 전화 통화내용을 녹음해 놓고 있다. 나는 모자간의 통화내역들을 몰래 엿들었다.


"아들, 바쁘나 은영이한테 말하지 말로 돈 100만 원만 입금해 주라."

"알았어요."

"은영이한테는 절대 말하지 마라. 만약에 은영이 알면 너 안 본다."

"네가 뭐하려고 말할 거고. 내가 번 돈인데, 당연히 말 안 하지."

"내가 몇 년이 걸리더라도 돈은 꼭 돌려줄 테니까, 은영이는 절대로 모르게 해라. 말하면 나 니 안 볼 거다. 내가 죽어버릴 거다."

"말 안 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보내드릴게요."


돈 이야기가 오갔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막상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보니 마음이 요동쳤다. 아내와 며느리를 향한 그들의 속마음을 여실히 표현하는 대화였다.

'그래 어머니하고 살아라.'


처음에는 오붓한 비밀을 나눈 것에 샘이 났다. 단돈 100만 원에 부자간 인연과 목숨이 오간다. 남편이 어여쁘다가도 부화가 난다. 단돈 100만 원 때문에 10년 넘게 최선을 다한 자취가 없어지니 나 자신도 뭉개진다. 가부장적인 남편 아래에서 남자아이 셋을 독박 육아로 키운 값이 너무 헐하다. 시어른의 가스라이팅에 온 마음이 긁혀가며 버텨온 대가가 처참하다.


시어머니는 내가 집에 있으면 근처 마트에 가서 캐셔 알바라도 뛰라며 친척의 며느리와 비교했다. 내가 일을 하면 '몇 푼 벌겠다고 아이를 방치하냐'며 집구석에서 애나 보고 있으라고 했다. 시아버지는 내가 셋째를 가지자 돈 벌러 나가기 싫어 애나 배는 여자 취급을 했다.


아이가 둘일 때에는 전집 영사도 하고 영어학원 강사로 일했다. 하지만 대개 남편 혼자 돈을 벌기에 100원도 허투루 쓴 적이 없다. 결혼 이후 스킨로션을 내 손으로 사 본 적이 없다. 아이들에게 방문학습지는커녕 학원도 사치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엄마인 내가 피아노를 가르치고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물건이 필요하면 중고 검색부터 했고 숙박비가 아까워 당일치기 여행만 했다. 적은 월급이지만 새어나가는 돈 없이 검소하게 살았고 그렇게 절약하며 돈을 모았다. 남편과 나 그리고 아이들의 욕구를 죽여가며 필요한 때에 잘 쓰자는데 우리는 한마음이었다.


아이만 키우는 내가 작아질 때면 남편에게 누누이 말했다.

"아내가 집에 없다면 당장 육아도우미, 살림 도우미를 써야 하지? 내가 집에서 노는 것 같아도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것 맞지? 그런데 나는 늙기만 하고 남는 게 없는 인생 같아."

" 아이들 잘 크고 있고 그게 남는 거지."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자식은 남는 게 아니야 다 독립시켜 떠나보내는 거지. 오빠는 월급도 남고 직급도 올라가고 자식도 남는 부자네 아주. 나는 기껏해야 나이만 남고 자식은 다 크면 자기 인생 살 텐데, 뭔가 허전하고 억울하다."

"내가 번 돈이 곧 우리가 번 돈이지."

곰의 발등이 찍혔다.

나는 미련해서 발등에 피가 나는지 아픈지도 모를 텐데, 고마운 허경영 전화의 힌트로 곰은 까칠한 여우로 거듭나게 생겼다.


시나리오 1>

다 알지만 모른 척 지내다 결정적 순간을 기다린다

다가오는 시아버지 생신날 시집으로 간다. 식사가 끝났다. 모두 잠시 가족회의를 하자고 제안한다. 며느리 몰래 시어머니가 아들에게 돈을 빌린 사실을 털어놓는다. 시아버지에게 의견을 묻는다. 부모에게 빨대 꽂은 시동생의 삶도 이참에 뜯어고치라고 독설한다. 힘들게 모운 우리 돈을 탐내지 말라고 알린다. 얼어붙은 시집을 뒤로하고 나온다


뿌듯한 마음으로 시아버지 생신을 기다렸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대하는 남편과 시어머니가 더 이상 얄밉지 않았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내는 여우도 며칠 뒤 있을 복수를 기다리며 담대하게 칼날을 다듬었다.


문득 나의 복수 계획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엄마들 커뮤니티에서 검색해 보았다.

아내 몰래 시집에 돈을 빌려주거나 가져다 바치는 남편이 생각보다 많았다. 나야 처음이겠지만, 수차례의 시집 뒷 돈거래로 속 썩는 여자들이 의외로 많았다. 댓글도 하나하나 읽어보았다. 내 생각과는 차원이 다른 지혜로운 댓글이 많았다.

'초장에 잡아야 합니다. 절대 그냥 넘어가면 안 돼요.'

'시댁에 몰래 주면 친정에도 몰래 주세요.'

'시댁 식구도 참 생각이 없네요. 세상에 모르게 가 어디 있나요. 사람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한 가정을 이루었으면 그 외는 다 남 아닌가요. 본가로 다시 반품되고 싶은가 봐요. 시집 사람들도 그렇지 자기 어렵다고 다른 가정 파탄 내네요 '

'부부에게 믿음이 가장 중요한데 상의하거나 알고는 있어야 하지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남편이나 그 엄마나 그 집안 봐도 비디오네요'

'자기 체면은 중요하면서 며느리가 속고 사는 것은 괜찮은가 봐요'

나를 응원해 주는 의견이 먼저 눈에 들었다.

한참 동안 나와 같은 사례를 찾고 댓글을 읽어나갔다.


'돈이 여유 있다면 어려우신 부모님 좀 드리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요.'

'오죽하면 아들에게 단돈 100만 원이 없어서 빌리실까요. 그냥 모른척하세요'

'며느리에게 부끄럽고 부인에게 민망해서 그런 건 아닐까요.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넓은 아량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여우의 탈을 쓴 곰은 완벽해 보였던 시나리오 1을 접었다.


다음 날 막내를 어린이집을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 남편과 해안가 드라이브를 했다.

"나한테 할 말 있지?"

"없는데?"

"솔직하게 말하면 그냥 넘어간다."

"정말 없다."

"어젯밤에 오빠 대신 전화받다가 끊어졌는데 허경영 전화였거든."

"그게 뭐? 말하고 싶은 게 뭐야."

"어머니와 통화내역이 많던데. 며칠 전에 몰래 통화하는 것도 그렇고"

"안부 전화한 거거든. 할 말 있으면 용건만 딱 말해."

"나 몰래 어머니 100만 원 드렸잖아."

"안 드렸는데? 내가 돈이 어디 있어?"

"나 통화 녹음된 거 다 들었는데?"

"어...?"

"어머니한테 돈 필요할 거 같다고 빌려드리라고 먼저 말했잖아. 이건 아니지. 내가 속이 좁아 보여서 돈을 못 주게 할 것 같았어? 아니면 사람 취급을 하기 싫었어? 돈이 문제가 아니라 둘이서 나를 속였다는 게 화가 나. 10년 넘게 시부모에게 험한 소리 들어도 참고 이어온 결혼생활의 결과가 이건가 싶어서 참 씁쓸하네."

"미안, 엄마가 하도 비밀로 하라고 해서..."

"어머니가 그리하셔도 오빠는 내 남편이니까 내 입장을 대변해서 바른 소리를 했어야지.

"어? 어."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해. 순순히 안 불고 발뺌한 거 의외고 2차 실망이다. 시어머니는 내가 말씀드릴게."

"어, 그런데 오늘 니가 좀 달라 보인다."

"알지? 나 뒤끝 있는 거."


집에 돌아와 시나리오 2를 작성했다.

그리고 시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그 글을 읽어 내려갔다.


"어머니 바쁘시지 않으세요?"

"어. 괜찮다."

"어제, 그저께 오빠하고 통화하셨어요?"

"아니. 안 했는데"

"오빠가 어머니께 돈 드린 거 저 알고 있어요. 어머니께서 며느리한테 들킬까 봐 걱정하시거나, 몰래 돈을 빌려서 미안해하실 것 같아서 전화드렸어요. 그러시지 않아도 된다고요."

"어, 어. 그런데 어떻게 알았노?"

"인터넷에서 물건 샀다가 품절이라 취소되었거든요. 오빠 통장에 돈이 돌아왔나 확인하다가 알게 되었어요. 어머니 아드님이 끝까지 시치미 떼다 제가 증거를 눈에 보여주자 실토했어요. 어머니와의 의리는 지켰으니까 아들을 안 본다느니, 어머니께서 죽어버리신다고 아들 탓을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어, 어. 그래. 이해해 줘서 고맙다. 이제 그런 일없을 거다. "

"네, 그렇게 하셔야지요. 동서네 둘째 나오는 날짜 정해졌다고 해서 제가  어머니 돈 필요하실 것 같다고, 자식인 오빠가 먼저 여쭤보고 성의껏 드리라고 미리 말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저를 속일 줄 몰랐네요. 어머니께도 많이 섭섭하고 오빠에게 정이 다 떨어졌어요. 어머니께서 시키신 대로 끝까지 거짓말로 버티더라고요."

"돈은 되는 데로 갚아줄게."

"아니, 괜찮아요. 어머니 마음 편하게 먹으시라고 전화드렸습니다. 전화 끊겠습니다."


나는 써두었던 시나리오 2를 다 읽지 않았다. 시어머니로부터 미안한 마음을 유발하려고 구질구질하게 써놓은 시나리오를 몇 줄 빼 버렸다.

마음이 약해져버렸다.


'마트에서 장 볼 때 애들 먹는 과일, 내가 좋아하는 오징어 한 마리도 사지 못하도록 눈치 주거든요. 돈 없다고 못 사게 해요. 아이들 학원은커녕 책도 못 사게 하는데...... 그렇게 아끼고 모은 돈, 부모님이시니 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10년 넘게 산 부부가 신뢰를 깨는 일은 안 된다고, 이렇게 하려면 오빠는 어머니랑 살아라고 그랬어요.'


제일 말하고 싶었던 말은 쏙 빼먹은 체 전화를 끊어버렸다.


30분쯤 뒤 시어머니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가 많이 섭섭겠다. 어쩌다 보니 아들 내외의 믿음을 깨는 부모가 되었. 미안하고 고맙다. 우리 아들도 나를 위해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니 남자가 입이 무겁네."

아들 칭찬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반나절의 시간이 지난 후 시어머니 전화가 왔다. 시아버지 생신에 시집에 올라오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가게도 힘들고 어머니도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 후로도 부모님을 찾아뵙고자 하는 몇 차례의 허락을 반려하셨다. 며느리 볼 낯이 없으신 것 같다.

죄를 짓는 사람이기 보다 용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산다는 것에 감사하다. 허경영전화 에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한다.


인간의 본질은
예상치 못한 일을 하는 것이므로
모든 인간의 탄생에는
세상을 바꿀 가능성이 수반된다.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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