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단비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비글방 Sep 10. 2021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여행

[단비글] '여행'


유럽 배낭여행을 떠나는 날 새벽, 화장실에서 토악질을 하다가 과호흡으로 쓰러졌다. 급성 장염이었다. 응급실 의사는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홀로 처음 가는 배낭 여행에 나는 설렘보단 걱정이 컸다. 유달리 계획을 철저히 세우는 것도 불안을 덜기 위해서였다. ‘영어가 서툴러 자주 면박을 당할지 몰라’, ‘인종차별과 소매치기는 피할 재간이 없어’, ‘뜻밖의 사고라도 나면 나 혼자 모두 감당해야만 해’. 예전에 본 사주팔자에서도 내가 마음의 불안을 키우고, 도리어 그게 가시처럼 나를 콕콕 찌른다고 했다.


여행을 하면서, 내가 상상한 불안은 자주 현실로 나타났다. 독일 뉘른베르크의 옷가게에서 “영어 할 줄 아세요?”라고 물어놓고는 정작 내가 영어를 못 알아들어 조롱당했다. 이탈리아 토리노에선 인종차별을 당하자 입에 담지 못할 욕이 절로 나왔다. 독일 작센스위스에선 중국인 일행들과 함께 여행하다 산에서 길을 잃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대뜸 말을 걸고, 무서운 사람들에게 물건을 집어던지며 맞서고, 길 잃은 산 속에선 중국인들과 함께 흥겹게 노래를 불렀다. 한국과 일상에서 평소의 나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제야 불안의 뿌리가 보였다. 익숙하지 않으면 멀리하는 태도. 다툼은 되도록 피하는 일상. 여유가 없는 마음. 그런데 여행은 내가 변해야만 살 수 있는 상황이다. 나는 변해야 하는 게 불안한 거였다. 일상에는 내가 매일 가야할 곳과 해야 할 일이 있다. 으레 편안하고 익숙하다. 사연 없는 삶은 없지만, 일상 없는 삶도 없다. 보통의 일상엔 일정한 리듬과 익숙한 자아가 있다. 그게 깨지는 게 두려웠다. 실제 여행에선 아주 박살이 났다.



이탈리아 토리노의 한 쇼핑몰에서 모자를 찾고 있었다. 내게 여러 모자를 찾아주던 직원이 카운터에서 내게 발냄새 제거제를 권했다. 그제야 어울리지도 않는 모자를 소개해주고, 또 씌어주기까지 하던 친절이 차별과 조롱이라는 걸 깨달았다. 멀리서 나를 쳐다보던 다른 직원의 안쓰러운 표정도 이해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욕을 뱉고 그 사람 얼굴에 모자를 집어던졌다. 화장실에서 찬물로 아무리 세수를 해도,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다.


여행 막바지 네덜란드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한 환갑의 리온에게 여행 전에 내가 가진 불안과 여정에서 겪은 일화를 이야기 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은 네게 값진 경험”이라며 나를 축하 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런 불안을 딛고 나선 여행이다. 온갖 일을 겪으며 넓은 세계를 본 것만으로도 넌 변했다는 이유였다.


불안은 떨쳐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불안한 이유는 일상에서 벗어나야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행을 통해 불안을 마주하고 직접 부딪히면 우리의 일상과 삶은 변화한다. 내 일상과 내 마음을 알게 되고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제는 불안할 때, 나는 그 불안이 가리키는 나의 일상을 살핀다. 그렇게 불안을 딛고 변화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행예찬 - 여행에 관한 정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