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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KN Jul 05. 2022

알고리즘 스테이블 코인은 불가능한 꿈인가

Feat. 태국 바트, 홍콩 달러


테라 사태 그 이후


테라가 무너진지 한 달이 넘었다. 들리는 소문처럼 정말 시타델과 블랙록의 작전이었는지 아니면 코인데스크에서 발표한 것처럼 테라 폼 랩스 내부에서 차익 거래를 하다가 무너진 것인지 아직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건 테라의 몰락이 암호화폐 시장의 지각 변동을 촉발했다는 것이다. 우선 해당 사태는 다양한 규제 마련의 계기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가상자산 관련 입법 논의가 활발해졌고, 미국에서는 UST의 몰락을 명분으로 삼아서 스테이블 코인에 대한 규제를 펼치려고 하고 있다. 

암호화폐 시장 내부에서 보면 테라의 몰락은 여러 Cefi 업체 및 VC들의 연쇄 청산을 불러왔다. Celsius는 입출금 중단을 선언하고 파산의 위기에 처했고, Blockfi는 FTX로부터 bail out을 받았으며, 3AC는 디폴트를 선고 받았다. 이렇듯 40조원 규모 생태계의 몰락은 매우 큰 후폭풍을 불러왔다.

사태 발생 직후부터 이 사태의 원인을 분석하려는 수 많은 양질의 글들이 쏟아져나왔다. 다양한 글들을 읽고 종합해보면 테라 몰락의 원인은 다음과 같이 4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필자가 읽은 리포트들 중 가장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글 두 개를 첨부한다 https://career.haechi.io/cde41de3-91cb-4976-a027-a19463421d5e & https://jumpcrypto.com/the-depegging-of-ust/)

1. 전체 UST 70% 가까이가 앵커 프로토콜에 예치되어 있었음
2. UST-3Pool의 유동성이 부족한 상태였음
3. Basis Pool 사이즈와 복구 주기가 작았음
4. 전반적으로 자본시장이 위축되는 분위기였음

이 4가지의 조건 중 필자는 특히 1번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2번, 4번은 타이밍과 관련한 조건이었고 3번은 알고리즘 자체의 설계와 관련된 조건인 것에 반해서, 1번은 UST 운영상의 미숙과 관련된 조건으로 미래에 등장할 스테이블 코인들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만약 앵커 프로토콜에 UST가 집중되어 있지 않고, 다양한 사용처들이 있었다면 UST는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글들을 적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https://stablelabs.substack.com/p/ecosystem-soundness-novel-criteria). 상관 관계가 낮은 다양한 사용처들이 존재하면 한 번에 UST를 시장에 내다팔려는 움직임이 약해지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필자가 접한 글들의 공통된 요지였다. 필자 또한 그러한 글들을 읽고 해당 의견에 설득 되었다. 그래서 이 글을 처음 작성하려고 했을 때는 달러 페그되어 있는 여러 화폐들과 UST를 비교하면서, 해당 화폐의 사용처가 한 곳에 몰려있지 않으면 알고리즘 기반의 스테이블 코인도 지속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하려고 했다. 하지만 달러에 페그되어 있는 여러 화폐들의 사례들을 공부하면서 undercollateralized 스테이블 코인은 불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게 되었다. 정말 앵커 프로토콜 이외에 다양한 UST 사용처(예를 들어, 실물 기반 카드나 성공적인 P2E 게임)가 있었다면 테라는 무너지지 않았을까?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연준의 기준 금리 인상 그래프 (출처: Bloomberg)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1997년을 이야기하면 대부분 IMF 외환 위기를 떠올릴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IMF’로 기억되는 1997년 외환위기는 본질적으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곳곳에서 발생한, 글로벌한 스케일의 사건이었다. 이러한 글로벌한 스케일의 금융위기의 시발점은 미국이었다. 90년대 초반 S&L(저축대부자조합) 파산으로 신용시장이 위축되고 경기침체된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연준은 1992년 9월부터 1994년 2월까지 17개월간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 수준인 3%로 유지하였다. 이 조치로 인해서 경기 침체가 회복된 것을 넘어 인플레이션 조짐이 보이자 연준은 1994년부터 시작해서 1년만에 3%이었던 기준금리를 6%까지 인상시켰다. 이렇듯 기준금리가 갑작스럽게 인상되자 신흥국에 투자되었던 글로벌 달러 투자금이 다시 미국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결과적으로 1980년대 후반부터 1994년 금리 인상 전까지 유동성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신흥국들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1994년에는 멕시코에서 금융 위기가 터졌고 3년 뒤인 1997년에는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한국 등의 아시아 국가로 금융위기는 퍼져나갔다. 


1. 태국 바트화의 고정환율제 포기


- 배경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는 태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97년 금융 위기 이전까지 태국은 1달러를 25 바트로 교환할 수 있는 고정환율제를 시행 중이었다. 이 당시 태국이 고정환율제를 운영 중이었던 가장 큰 이유는 외국 자본의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바트가 달러에 페그되어 있지 않고 계속해서 가격이 크게 변동한다면 환율 리스크로 인해 외국 자본들이 투자를 꺼리기 때문이다. 이렇듯 1997년 이전의 태국 바트화는 미국 달러에 페그되어 있는 일종의 스테이블 코인이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5년까지 태국은 경제 성장률이 평균 10%에 육박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였다. 이렇듯 빠른 성장률을 바탕으로 태국은 많은 투자금을 외국에서 유치하였고, 1996년에는 그 금액이 133억 달러에 달했다. 단기간 내에 이렇게 많은 자금이 태국으로 유입되면서 주식과 부동산 시장에 버블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경기 과열을 저지하기 위해 태국 정부는 1994년부터 긴축적인 금융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이는 금리 인상과 부동산 가격 하락으로 이어졌으며, 결과적으로 부동산 및 금융 회사들의 파산을 불러왔다. 이렇듯 태국 내의 자산 시장에 위기가 찾아오자 태국에 투자를 감행했던 외국 자금은 빠르게 빠져나가기 시작하였다.

태국의 GDP 성장률


- 태국 바트화의 고평가 인식 및 공매도

1997년 당시 태국 경제의 성장률은 둔화되었고, 부동산 및 자산 시장의 버블 또한 꺼지고 있는 중이었다. 또, 금융기관들은 과도한 부동산 담보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으며경상수지 적자 폭은 증가 추세에 있었다. 이는 외부 세계에 바트화가 고평가되어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스탠리 드러켄밀러줄리안 로버트슨 등의 유명 헤지펀드 매니저들을 필두로, Goldman Sachs, JP Morgan, Citi 등 월가 금융기관의 외환 딜러 조직이 가세하여 태국 바트화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수십억 바트를 한 번에 시장에 내다 파는 방식을 통해 바트화의 평가 절하를 이끌어내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 태국 정부는 자본 통제와 주변국과의 협조를 통해 96년 12월, 97년 2월, 97년 5월 총 3 차례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에는 성공하였다. 하지만 태국의 외환보유고는 결국 바닥이 나고 말았고, 1997년 7월 2일 태국은 바트화의 달러 고정환율제 폐지를 선언하고 얼마 후 IMF의 구제 금융을 받게 된다.

태국 바트화의 가치 절하 (출처:Greenmango Research)


- 페그제 포기 원인 분석

1997년 7월 이전까지 태국은 1달러를 25 바트로 교환할 수 있는 고정환율제를 채택함으로써 바트화를 일종의 달러 페그 스테이블 코인으로 만들었다. UST와 Luna 혹은 FRAX와 FXS처럼 두 개의 자산을 알고리즘으로 묶는 형태가 아닌 스테이블 코인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유통량만큼의 담보가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해당 스테이블 코인에 대해 숏 포지션을 잡은 세력이 계속해서 태환을 요구하거나 시장에 해당 스테이블 코인을 가져다 팔면 담보는 바닥이 나고, 결과적으로 스테이블 코인의 페그는 깨지기 때문이다. 태국의 경우를 살펴보면 1990년에서 1996년까지 태국 바트 유통량(M1)보다 태국 외환보유고가 평균 2배 가까이 많았다. 즉, 태국 바트 발행량(M1)와 태국 외환보유고만 놓고 보면 태국 바트는 overcollateralized 스테이블 코인이었다.

[표 1] 태국 M1/외환보유고 (출처: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하지만 단순히 이 수치만으로 태국 바트가 overcollateralized 스테이블 코인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 이유는 태국 내에 존재하던 단기 외채 때문이다. 단기 외채란 빌릴 때 만기를 1년 미만으로 설정한 외채로 상환연장이 불가능해지면 즉각 외화유동성 부족을 가져온다. 단기 외채가 많은 상태에서 국내 경제에 위기가 찾아오면 급격하게 외화가 유출될 수 있기 때문에 단기 외채와 외환보유고의 비율을 알맞게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태국의 경우 1990년까지는 단기 외채/외환보유고의 비율이 62.55%으로 단기 외채보다 외환보유고가 많았다. 하지만 이 수치는 꾸준히 증가하여 1996년에는 거의 100%에 다다르게 된다. 즉, 단기 외채와 외환보유고의 양이 같아진 것이다.

[표 2] 태국 단기 외채/외환보유고 (출처: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표 1]만을 보면 1990년에서 1996년까지 태국 바트 유통량(M1)보다 태국 외환보유고가 평균적으로 2배 가까이 많아서 태국 바트가 overcollateralized 스테이블 코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표 2]에 나와 있는 태국의 당시 단기 외채/외환보유고 비율을 여기에 대입하면, 사태 발생 당시 태국 바트는 사실상undercollateralized 스테이블 코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96년 12월, 97년 2월, 97년 5월 총 3 차례의 공격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1997년 연초 459억 달러에 달했던 태국의 외환보유고가 25억 달러 수준으로 감소하자 결국 1997년 7월에 고정환율제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태국이 단기 외채와 태국 바트 발행량을 합친 것을 뛰어넘는 양의 외환을 보유하고 있었다면, 충분한 외환보유고를 바탕으로 미국 헤지펀드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 시사점

UST처럼 undercollateralized 스테이블 코인이었던 태국 바트화는 과연 다양한 사용처가 없었을까? 태국 바트화는 UST처럼 앵커 프로토콜과 같은 하나의 서비스에 전체의 70%의 물량이 묶여있지 않았다. 태국 바트화는 1997년 기준으로 1500억 달러의 GDP를 기록했던 국가의 공식 통화였다. 태국 바트화는 주식, 부동산, 예금, 보험 등의 정말 다양한 금융 상품에 배분되어 있었으며 태국 국민들이 일상 생활을 위해서 매일 같이 사용하던 화폐였다. 이렇듯 다양하고 상관 관계가 낮은 사용처가 충분히 존재했음에도 태국 바트화는 페그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태국 바트화의 담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태국과 비슷한 이유로 1997년 아시아 외환 위기 때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들이 고정환율제(달러 페그 스테이블 코인)를 폐지하였다. 해당 국가들의 통화도 태국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사용처에 분산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페그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사례들에서 UST가 앵커 프로토콜이 아니라 여러 사용처에 분산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극단적인 상황에서의 stress test에서는 그 페그를 잃었을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2. 홍콩 달러의 달러 페그 방어


- 배경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화폐의 평가 절하를 차례대로 성공시킨 월가의 헤지펀드들은 그 다음 타겟을 홍콩으로 잡았다. 선물환 거래가 국가에 의해서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던 대만, 인도, 중국, 한국와 달리 자유롭게 거래 가능한 홍콩 달러가 공격 대상으로 적절해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홍콩은 1983년부터 홍콩 통화청에 의해서 달러와 홍콩 달러의 교환 비율을 1:7.75로 유지하고 있었다. 월가의 헤지펀드들은 이러한 홍콩 달러를 공매도 하기 시작하면 앞서 무너뜨린 동남아시아 나라들처럼 홍콩도 달러 페그제를 폐지하고 홍콩 달러의 평가 절하를 감행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 홍콩 달러 페그 방어

하지만 홍콩은 앞서 그들이 무너트린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달랐다. 계속된 공격에도 홍콩 달러는 그 페그를 유지하였고 결국 월가의 헤지펀드들은 공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홍콩이 페그를 지킬 수 있었던 첫번째 이유는 홍콩이 아시아의 금융 허브로서 동남아 국가들보다 펀더멘탈이 좋았으며 무역 흑자국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펀더멘탈을 바탕으로 홍콩은 단기 금리를 올리는 방식으로 헤지펀드들의 공격에 방어하였다. 금리를 올리면 자국 화폐 가치는 방어할 수 있지만 주가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주식 투자보다 이자를 받는 것이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항셍지수는 1년만에 고점 대비 50% 이상 폭락하게 되었다. 당시 홍콩은 달러 페그를 위해서 홍콩 증시를 희생시켰다.

1997년 5월부터 1998년 7월 항셍 지수 [출처: Yahoo Finance]

홍콩이 페그를 유지할 수 있었던 두번째 이유는 홍콩의 풍부한 외환보유고 덕분이었다. 오랫동안 아시아의 금융 허브로 활약해오면서 홍콩은 많은 양의 달러를 외환보유고에 축적하고 있었다. 1997년 홍콩의 외환보유고는 928억 달러에 이르는 등 당시 태국의 4배 가까이 되었다. 이러한 풍부한 외환보유고를 바탕으로 홍콩은 월가 헤지펀드들의 공격을 적극적으로 방어하였다. 직접 홍콩 달러를 매입하기도 하기도 하고, 2주 동안에만 150억 달러를 투입하여 홍콩 주식을 매입하는 등 국제투기자본과 맞서 싸웠다. 결국 총알이 먼저 바닥난 것은 월가의 헤지펀드들이었고 홍콩은 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하게 헤지펀드들의 공격 속에서도 달러 페그를 유지할 수 있었다.

[표 3] 홍콩 외환보유고. 단위: 10억 달러 (출처: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 시사점

홍콩 달러도 태국의 바트와 마찬가지로 달러 페그 스테이블 코인이었다. 하지만 태국의 바트와 달리 홍콩이 외부의 공격에도 페그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홍콩의 경제가 탄탄한 것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홍콩 달러가 overcollateralized 스테이블 코인이었기 때문이다. 1997년 홍콩 달러의 유통량(M1)은 약 268억 달러였다(홍콩의 1996년 이전 M1 유통량에 대한 자료는 찾을 수가 없어서 태국처럼 표를 만들 수가 없었다). 그에 반해서 외환보유고는 [표3]에서 보이는 것처럼 928억 달러였다. 즉, 홍콩은 홍콩 달러의 유통량보다 3배 이상 많은 외환보유고를 가지고 있었다. 

앞선 태국의 사례를 분석했을 때처럼, 우리는 단순히 통화 유통량과 외환보유고만 보지 않고 단기 외채와 외환보유고의 비율까지 함께 참고해야 홍콩 달러가 overcollateralized 스테이블 코인이었는지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1990-1997년 사이의 홍콩의 단기 외채 자료를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태국과 중국의 단기 외채/외환보유고 비율을 가져왔다. 

[표 4] 태국과 중국의 단기 외채/외환보유고 (출처: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생과정과 원인)

당시 홍콩은 아시아의 금융 허브로서 지속적인 무역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고 외환보유고도 많았기 때문에 분명 태국보다 단기 외채/외환보유고의 비율이 낮았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보다는 외환보유고가 적었고 무역 흑자도 작았기 때문에 단기 외채/외환보유고의 비율이 중국보다는 높았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따라서 우리는 1996~7년 홍콩의 단기 외채/외환보유고 비율이 태국과 중국 사이였을 것이라 추정해볼 수 있다. 홍콩은 홍콩 달러의 유통량보다 3배 이상 많은 외환보유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단기 외채/외환보유고의 비율이 99.69%로 태국과 같다고 하더라고, 단기외채와 홍콩 달러 유통량을 합친 것보다 많은 외환을 보유하고 있었다. 즉, 홍콩 달러는 확실하게 overcollateralized 스테이블 코인이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전 국가들과 홍콩 사례의 비교를 통해 결국 극한의 상황에서 러 페그를 유지시켜주는 것은 분산된 사용처가 아니라 충분한 양의 담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홍콩 달러는 2022년 현재까지도 여전히 달러 페그제를 시행하고 있다. 1997년 헤지펀드들의 공격 이후 여러 차례 위기가 있었지만 홍콩 달러의 달러 페그는 단 한번도 깨진 적이 없다. 그 이유는 역시 홍콩의 풍부한 외환보유고 덕분이다. 2008년 경제 위기 때도, 그리고 작년 미국과 중국의 외교 분쟁 때도 홍콩이 굳건하게 페그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M1 유통량 대비 4배 이상 많은 외환보유고 때문이었다. 만약 가까운 미래에 홍콩 달러에 대한 공격이 들어온다고 하더라고 홍콩은 금리를 올리지 않고서도 외환보유고만으로 해당 공격을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undercollateralized 달러 페그 화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결국 해당 자산을 백킹할 수 있는 담보가 충분하지 않으면, 해당 화폐의 페그는 대규모 공매도와 같은 stress test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설령 해당 스테이블 코인이 얼마나 큰 시장을 구축하고 있고 분산된 사용처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결국 페그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태국, 필리핀 등 국가들의 사례와 끝까지 페그를 지키고 있는 홍콩의 사례에서 우리는 스테이블 코인이 페그를 유지하는데 분산된 사용처는 사실 큰 역할을 하지 못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충분한 담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원인은 결국 사람들이 달러에 페그되어 있는 화폐를 사는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스테이블 코인은 결국 달러에 그 가치가 연동되어 있다. 즉, 사람들이 스테이블 코인을 구매하는 이유는 그 스테이블 코인 자체가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달러를 사고 싶기 때문이다. 이러한 달러에 대한 수요는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그리고 다양한 알트코인들과 비교해서 (혹은 다른 나라와 화폐와 비교해서) 달러는 변동성이 작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달러를 바로 블록체인상에서 거래할 수 없기에 우리는 스테이블 코인을 통해서 블록체인 상에서 다양한 거래를 진행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내가 어느 순간에 특정 스테이블 코인을 전부 달러로 교환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면 해당 스테이블 코인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소비자들이 결국 원하는 것은 달러를 블록체인에서 안정적으로 거래할 수 있는 스테이블 코인이지, 결코 정교한 알고리즘으로 구현되어 자본의 효율성은 높지만 뱅크런의 가능성이 있는 스테이블 코인이 아니다. 어떤 스테이블 코인이든 시장 상황이 좋지 않아 불안감이 투자자들을 덮치고 외부의 공격이 들어오는 극한의 상황에 내몰릴 때, 투자자들의 대부분이 태환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정교한 알고리즘과 다양한 사용처가 있더라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충분한 담보가 없다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것은 스테이블 코인이 달러나 원화와 같은 '화폐'가 아니고 달러 혹은 특정 법정화폐에 그 가치가 고정된 '토큰'이기 때문이다. 화폐는 신용을 바탕으로 찍어낼 수 있지만, 특정 화폐와 그 가치가 정확하게 연동된 토큰은 결코 충분한 담보 없이 신용을 바탕으로 발행될 수 없다




생각해볼만한 주제: 메타버스 내의 기축 통화는 달러가 될까? 아니면 이더리움 혹은 새로운 암호화폐가 기축 통화의 자리를 가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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