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만남의 즐거움은 배가 되고
2022년 2월 20일 나는 인생 처음으로 유럽에 왔다. 그리고 프랑스에 왔다. 불어불문과에 입학해서 프랑스 언제 가보나 했는데 드디어 왔다. 그런데 생각보다 얼떨떨해서 그런지 큰 전율이 느껴진다거나 울컥하진 않는다. 그저 모든 게 낯설고 마음이 살짝 간질거릴 뿐.
너무 이른 아침에 숙소에 도착한 나는 너무 피곤한 상태였고 파리 여행 계획도 없었다. 비행기에서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몸은 뭐할지 생각하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그래서 짐 정리도 하지 않은 채 호스트 아주머니가 주신 마들렌과 티를 마시며 콘센트에 충전기를 꽂고 핸드폰을 켰다.
가족, 친구들에게 잘 도착했다는 연락을 남기고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파리에 도착했다는 사진을 올리고 나니 파리에 살고 있는 펜팔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한국에 있었을 때 불어 회화실력을 늘리기 위해 이것저것 언어교환을 많이 했었는데 그때 알게 된 친구이다. 프랑스에 오면 보자는 약속을 한 친구가 몇 명 있는데 그중 한 명이다.
<파리에 온 걸 환영해! 우리 볼 수 있겠네>
<고마워! 오늘 오전에 도착했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럼 오늘 볼까?>
<오 좋지! 그런데 지금은 너무 피곤하니 낮잠 자고 다시 연락할게 >
<좋아 그럼 저녁에 보자>
그렇게 나에게 친구 덕에 고민 없이 첫 번째 일정이 생겼다. 이곳에 도착해서 내 기분은 마냥 신나고 설레지만은 않았다. 익숙한 공간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혼자 있으니 공허하고 싱숭생숭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친구의 연락이 더욱 반가웠다. 그제야 나는 편하게 눈을 감고 지친 몸을 조금 충전할 수 있었다.
여행은 예상치 못한 인연과 상황에 풍요롭게 채워가는 게 진정한 여행의 묘미라 생각한다.
아름답지만 아직은 무서운
기절하듯 잠이 들어 눈을 뜨니 순간 여기가 파리인지 서울인지 분간이 안되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창 밖을 보았다. 해 쨍쨍할 때 도착했는데 창 밖은 푸르스름한 어둠 속 집집마다 켜진 주황 조명이 은은하게 테라스들을 비추고 있었다. 낮과는 다른 느낌의 분위기였다. 파리를 배경으로 한 낡은 질감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아, 내가 파리에 있구나 다시 실감 나게 해 주었다. 중간중간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도 나에겐 참 이국적이었다.
친구에게 일어났다는 연락을 남기고 외출 준비를 했다. 친구는 라틴지구에서 보자는 말과 약속 장소 주소를 보내줬는데 구글 지도로 검색을 해보니 지하철을 타고 이동해야 하는 거리였다. 어두컴컴해진 거리를 보니 겁이 났다. 파리 1일 차, 난생처음 마주하는 유럽은 아직 두려움 그 자체였다. 소문으로만 듣던 파리 지하철을 저녁에 도전하기에는 최상의 컨디션이 아니었다.
결국 우버를 불러서 약속 장소까지 나갔다. 택시에서 내려서도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경계심을 일으켰다. 지하철 역 앞에서 초조하게 친구를 기다리고 있을 때 나의 경계심을 깨는 반가운 얼굴이 내 앞에 등장했다.
파리지앵 시점으로 따라간 파리
자전거를 끌고 온 친구는 나를 크레페 맛집으로 데려갔다. 내부에 자리는 없는 길거리 작은 크레페 가게였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맛집 냄새가 났다. 근사하고 멋진 식당이 아닌 소박하고 평범한 파리지앵의 일상을 보여주고 싶다 한 그 친구의 계획이었다. 나름 콘셉트가 있는 가이드였다.
크레페는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Sucré(달콤한, 누텔라 크림과 과일 등이 들어간 우리가 아는 디저트 느낌의 크레페)와 Salé (짭짤한, 베이컨, 계란 등이 들어간 기름지고 한 끼 먹은 느낌 나는 크레페) 친구와 나는 저녁 대용으로 가장 클래식한 Salé 를 시켰다.
우리는 크레페를 사서 그 친구가 안내하는 대로 걸었다. 판테옹 앞에 앉아서 먹자고 했다. 2월이라 아직 추웠지만 그 나름 너무 재밌고 낭만 있어서 친구가 이끄는 대로 그저 따라가기만 했다.
어디서 무얼 할지 모르는 상태로 친구가 가는 대로 따라가니 판테옹이 나왔다. 교과서, 미디어로만 접한 역사적인 인물들이 잠들어 있는 이곳, 그리고 판테옹 옆 웅장한 소르본 대학과, 판테옹을 등지고 마주한 작게 보이는 에펠탑이 별처럼 빛을 내고 있었다.
해변에서 모래놀이를 하다 우연히 보석을 발견한 기분이랄까. 프랑스 와서 에펠탑은 필수코스이지만 그 날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더 감동적이었다.
크레페는 정말 맛있었다. 하지만 곧 비올 것 같은 흐린 날씨와 겨울바람에 금방 배가 찼다. 그래서 다 먹지는 못했다. 파리 거리에는 쓰레기통이 많았다. 한국이었으면 어디에 버릴 곳이 없어 계속 들고 다녔겠지만 프랑스는 길거리에 쓰레기통이 많아 참 편했다.
갑자기 비바람이 세져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아무 카페 겸 펍에 들어갔다. 길거리 사람들을 보니 아무도 우산을 쓰지 않았다. 일상이란 듯 꿋꿋이 걷고 있었다. 심지어 테라스에 앉아 수다를 떠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비바람이 더 세져 간판을 흔들기 시작하자 그제야 테라스에 있던 사람들 하나 둘 실내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카페에서 따듯한 초코라떼를 시킨 후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사실 실제로는 처음 본 사이였지만 원래 파리에서 알고 지낸 친구처럼 편하고 재밌었다.
자정이 다되어가 우리는 카페에서 나왔다. 비는 아직 추적추적 오고 있었다. 바람이 더 차게 느껴졌다. 친구가 자전거로 숙소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자전거로 20분 거리였다.
비 오는 파리의 밤, 그리고 자전거
그렇게 파리의 밤거리를 자전거로 달렸다. 거리는 꽤 넓었고 자동차는 많지 않았다. 자전거 도로는 한국보다 잘되어있었다. 차가 아예 없을 땐 가끔 신호도 무시했다. 이곳에서는 무단횡단하는 게 일상이란다. 파리지앵 스타일이라나 뭐라나… 한국에서 열심히 신호 잘 지켜가며 살아온 나는 조금 충격이었다. 하지만 뭐 프랑 스니까. 그러려니 했다. 센강변을 달리는 순간 머릿속에선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배경음악 < sit u vois ma mère>가 흘러나왔다.
달리다 보니 루브르 박물관이 보였다. 친구는 일부러 그 안으로 들어가 피라미드 주변 한 바퀴를 돌고 다른 문으로 빠져나갔다. 늦은 밤 루브르 박물관의 불빛들은 너무나 찬란하고 황홀했다.
<파리지앵과 자전거 타고 파리 야경 감상> 투어 상품 같은 완벽한 코스였다. 하지만 오히려 관광객 시점 아닌 내가 그들의 일상에 녹아든 파리의 모습은 잔잔하게 가슴속에 스며들어 콕 박히었다. 그리고 진한 여운을 남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