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니가 보고 싶어>와 <지구에서 한아뿐>을 읽고
가벼움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얻을 수 있는 무게를 가늠하며, 지치지 않고 쓰겠습니다.
<덧니가 보고 싶어> 작가의 말 중
작년 6월 즈음에 또 엄마 추천으로 읽은 소설이 있었는데, 바로 장강명 작가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여러 개의 소제목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과 독특한 스토리라인으로 나의 예상을 마구 뒤흔들어 놓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게 두 책의 공통점이다. 지금은 그 소설 속 이야기가 ‘나의 예상을 마구 뒤흔들어 놓는 이야기’라고 묘사될 만큼 나에게 너무 흥미롭고 색다른 경험으로 자리 잡았지만, 작년의 나만 해도 그 이야기는 한낱 이상한 내용, 이해할 수 없는 내용에 불과했다.
영화 <빅 피쉬>를 보면, 아들은 늘 아버지의 판타지스러운 인생 스토리에 납득하지 못하고 항상 진실만을 들려달라고 요구한다. 그렇지만, 결국 우리에게 중요하고 훗날 기억에 남게 될 것은 아무리 허무맹랑한 이야기일지라도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행복을 느끼는 그 순간일 것이다. 소설에 타당한 이해관계나 인과 관계는 필요 없고, 우리가 소설을 읽고 그 순간의 행복을 느끼면 그걸로 소설은 본래의 역할을 다한 거라고 생각된다.
특히 나는 평소 상상이나 공상을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소설이라는 장르를 받아들이기 꽤나 어려워했었다. 늘 무엇인가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고 그 의미를 발견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고 살았었다. 그리고 그게 문학으로도 당연히 이어졌고, 말도 안 되는 판타지가 어떤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결론이 나지 않는다면 뭔가 찝찝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이번 책을 통해 소설을 그냥 소설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기니 좋았다. 정세랑 작가가 소설을 통해 전하는 이런 가벼움에 대한 가치를 느낄 수 있어서,, 이런 점에선 내 인생에도 운이라는 게 좀 작용하나 보다.
<덧니가 보고 싶어> 중
마음을 얘기하고 사랑을 얘기할 때는 역시 진지해야 해. 어디서 누구를 사랑하고 있든 간에 신중히 사랑을 말하길. 휘발성 없는 말들을 잘 고르고 골라서, 서늘한 곳에서 숙성을 시킨 그다음에, 늑골과 연구개와 온갖 내밀한 부분들을 다 거쳐 말해야 한다고.
단심, 흐리멍덩한 붉은색이 아니라 좌심실의 붉은색, 가장 치명적인 부분을 헤집어 보여주는 것 같은 진지함이 있었다.
소설 끝에서 용기의 몸에 새겨지는 글자들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생기게 됐는지에 대한 질문을 물었던 나는, 그 글자들이 용기를 재화에게 닿게 해 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늘도 네 좌표를 알지 못해. 우리의 좌표가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알지 못해. 네가 나빴는지, 내가 나빴는지, 우주가 나빴는지 알지 못해. 그렇게 말할 필요가 있었다.
<지구에서 한아뿐> 중
여러 개체가 한 단위가 되는 풍습은 꽤 보편적으로 있어
우주적으로 초월한 자가 결혼을 정의하는 방법ㅋㅋㅋ
그러니 어쩌면, 한아는 이제야 깨닫는 것이었는데, 한아만이 경민을 여기 붙잡아두던 유일한 닻이었는지 몰랐다. 닻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유약하고 가벼운 닻. 가진 게 없어 줄 것도 없었던 경민은 언제나 어디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종국에는 지구를 떠나버린 거다. 닻이 없는 경민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을까?
한아가 여태껏 그에게 자신의 사랑법과 자신의 만족감만을 강요했지만, 시간이 지나 새로움을 경험해 본 지금에서야 비로소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됐고 그의 입장에서 나를 직면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