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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May 02. 2024

[소설] 어떤 간접경험은 직접경험보다 낫다_마지막 거인

[소설] 어떤 간접경험은 직접경험 보다 낫다_마지막 거인

 어떤 책은 읽는 것 자체만으로 '경험'보다 더 나은 경험을 만든다. 이 책이 그 책이다.

 어휘가 만든 착시 때문에 우리는 종종 '직접경험'이 '간접경험'보다 우위에 있다고 착각한다. 그렇지 않다. 달을 바라 볼 때, 저마다 다른 생각을 갖는다. 누군가는 '달 탐사'를 떠올리고, 누군가는 '서정시'을 떠올린다. 누군가는 '설화'를 떠올릴지 모른다. 육안으로 달을 직접 봤다고 달에 대해 알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의미다. 우리가 '달'에 직접 가본다 한들. 간접 경험은 때로 직접 경험이 대체 할 수 없는 무언가를 준다.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스쳐 지나간 것을 볼 수 있다.

'책'에 갇혀 여행 한 번 해보지 못한 사람이 때로는 여행을 많이 한 이들보다 더 많은 인사이트를 얻는 이유다. 단순히 직접 경험을 쌓았다고 모두 내적 자산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맹인이 읽는 '점자책'이 더 '달'을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고로 어떤 경우에는 '작가'보다 더 많은 것을 '독자'가 얻을 수 있으며, 실제 기행한 이들보다 기행문을 읽은 이들이 더 많은 것을 얻기도 한다.

 최근 읽었던 '먼곳에서'라는 소설에 이어, '마지막 거인'도 그런 류에 속한다. 직접 경험을 상회하는 간접 경험을 얻을 수 있는 책.

 단순히 물리적 공간에 대한 여정이 아니라, 시간을 뛰어 넘고 현실을 뛰어 넘는 서사가 있다. 그런 경우는 틀림없이 '여행'이 주지 못하는 다양한 인사이트를 준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책을 읽는다. 아이와 함께 양질의 간접 경험을 쌓는다. 같은 생각을 쌓고 같은 것을 본다. 현실에 존재하는 것만 볼 수 있는 이들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2만원도 하지 않는 가치로 이처럼 세 가족이 짧고 간편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꽤 의미있는 활동이다.

 마치 같은 여행지를 다닌 것처럼 같은 추억을 공유한다. 그 여행지는 현실 공간이나 시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굳이 모든 사고를 '현실'에 두는 이들과 강력하게 다른 차이를 갖는다.


 '거인'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다. 동서양 할 것 없이 '거인'은 '설화'에 항상 있어왔다. '다름'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피부색이 검은 이를 최초로 만나거나, 피부색이 하얀 이를 최초로 만난다면 분명한 호기심이 생긴다. 호기심은 '모를 때' 발생한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 때는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모른다'는 호기심을 만들지만 '두려움'를 만든다. 이 두 오묘한 감정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설레임'과 같은 감정을 만든다. 그렇게 상상력은 만들어진다.

 아치볼드 레오폴드 루스모어는 굉장한 물건을 만난다. 바로 '이'다. '이'라는 것은 '치아'다. 누군가의 어금니다. 그 어금니가 '거인'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루스모어'는 거인족의 나라를 찾아 나선다.

 '여행' 혹은 '탐험'은 '모름'으로 떠나는 여정이다. '모름'은 '설레임'을 만든다. 책과 함께 여정을 하는 독자는 역시 서서히 '서사'를 열어 젖히는 과정에 서 있다. '화자'가 직접 격는 '경험'과 같은 '간접 경험'을 쌓는다.

 서적을 통해 '간접경험'이 쌓인다. 험난한 모험은 '역사책'에서 보던 '광경'을 눈 앞에 만들어 낸다. 우리의 뇌가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지 못하고 '부정'과 '긍정'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것을 읽어 낸 순간 그것은 거짓없이 진실한 나의 경험이 된다. 아름답고 설레이는 이 이야기는 한껏 속도를 높이며 달려가다가 절정을 만난다. 새롭게 받아 들여지는 경험이 익숙한 경험과 결합된다. 어디에서 듣기에 우리는 '낯선 경험'을 싫어한다. 가장 낯선 광경에 처 했을 때, 우리의 뇌가 필사의 노력으로 가장 비슷한 기억을 끄집어 온다. 그것을 '데자뷰'라 부른다. 우리의 뇌는 새로운 정보를 '기존 정보'와 결합하는 방식으로 융합과 인식을 한다.


 새로운 정보는 기존 정보와 결합된다. 이기적이고 잔인한 인간을 간접정보로 마주하면서 피하지 못할 기존 정보가 끄집어진다. 존재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의 자극은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의 기억을 불러 들인다. 우리는 과연 모두가 당당하고 무고한가. 그런 질문이 문뜩 떠오른다.

"침묵을 지킬 수는 없니?"

 소통과 이해, 그리고 문화간의 갈등에 대한 한마디 물음. 여기서 침묵은 오해와 불신을 의미한다. 침묵을 깨는 것은 때로 존재하지 않아도 될 것을 존재하게 한다. 탐험가와 거인들 사이에 긴장된 상호작용을 깨버린 무언가. 우리는 '의사소통'이라는 중요한 '키워드'를 멋대로 남발하지만 진짜 의사소통은 상대를 설득시키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 서로를 이해하려 할 때 종종 겪는 어려움은 이처럼 '침묵'으로 상징된다. 상대의 이야기 하나를 듣고 나의 이야기를 하나 넘긴다. 이 의사소통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의 것을 넘기기 위해, 남의 이야기를 겨우 참아 듣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소통이 아니다. 거기에는 '승리'와 '설득'이라는 목적이 있지, '이해'가 들어있지 않다. 새로운 이방자이자 탐험가의 여행 일지는 그들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한다. 그들과 교류하고 삶과 문화를 이해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직면한 위기와 멸종의 위협을 목격한다. 단순한 탐험과 모험의 설레임이 아니라 문명과 그 이면의 문제들, 그리고 다른 존재들과의 공존에 대한 깊은 물음을 제기한다.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 소통과 다름의 인식이라는 심오한 성찰을 담은 이 소설. 이런 다양한 감정은 꽤 값비싼 여행과 직접 경험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봄날, 여덜 살 아이와 거실 안락 의자에 앉아, 다양한 물음과 대답을 해 보았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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