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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 lilla Sep 11. 2024

아들의 입시 후 아쉬웠던 점

큰 아들 입시준비하면서 전체적으로 가장 아쉬웠던 점은 국어 준비를 소홀히 했다는 점이다. 입시에 대해 잘 몰랐고, 아주 예전 '나때' 떠올리며 쉽게 생각했었다. 큰 아이는 앞서 얘기했듯이 글쓰기를 잘했고, 중학교 때 큰 어려움이 없었고 우리나라 말이니 어련히 잘 하라리는 아주 막연하고 안일한 생각을 했었다. 큰 아이는 문법을 아주 어려워했고, 학년이 갈수록 국어에 대한 반감은 더해갔고 나중에는 증오하고 자신의 국어 실력을 글쓰기 실력을 폄하하기까지 했다. 또 하나의 원인을 들자면 나의 독서에 대한 무조건적 강조도 영향을 미친것 같다. 독서를 많이 하지는 않지만 난 아이들에게 독서를 많이 강조했었다. 그래서 큰 아들이 어릴 때는 평균 하루에 3권, 3년 아이들 그림책을 1,000권 정도는 읽어 준 것 같다. 그러나 큰 아들은 중학교 이후로는 학교과제 외에는 거의 책을 읽지 않았다. 나의 잔소리는 여기서 거쳤었야 했는데, 책 읽은 시간이 없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잔소리를 했고 큰 아들은 자신이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국어 성적은 더 이상 오를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중3 겨울방학 때부터 국어 학원을 다녔으면 하는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든다. 내가 그때 한 것은 아내 주변 지인의 말을 듣고 수능 국어 관련 잡지를 구독한 것과 고등학교 국어 교사인 친구의 조언을 들어 EBS 강좌를 신청한 것이었다. 구독한 잡지 때문에 먼지와 나의 잔소리만 쌓여 갔고, EBS 강좌는 듣는 둥 마는 둥 흐지부지 되어 버려 교재비만 날렸다. 수능 1교시 국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알고 있기에 걱정이 많이 되었다. 걱정이었던 것은 국어 성적이 그렇게 나쁘지 않음에도 평소의 이야기를 통해서 판단해 보면 국어에 대한 인식이 혐오의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수능에서는 아깝게 3등급을 받았다. 가채점시에는 2등급을 예상했었는데 안타깝게도 3등급이 나왔지만 고려대 반도체공학과(계약학과) 최저는 맞추었었다. 안타깝게 불수능의 여파로 지난해 예비번호 15번까지 갔었는데 2024년도에는 예비 4번에서 마감되었다. 아들은 예비 7번이었다 ㅠㅠ


두 번째 아쉬웠던 점은 수학을 큰 학원에서 동네 학원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학원 공부를 선호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아내와 언쟁도 많이 벌였지만 지금의 사회분위기에서는 무모한 고집에 불과했고 내가 주도해서 가르치지 않는 한 난 아내의 의견에 따라 학원을 보내야 했다. 고맙게도 큰 아들은 열심히 했고, 어릴 때 수학문제집 풀기 싫어서 답안지 보고 베껴서 여러 번 혼났던 아들이 수학을 재미있어했고 성적이 계속 올라갔다. 그래서 중2 때 조금 더 큰 학원으로 옮겼고, 거기서도 최상위 클래스까지 올라갔다. 고1 첫 시험(모의고사, 내신)에서는 4등을 해서 기대감이 컸었다. 아들이 고1 입학하면서 동네 학원으로 옮겼으니 중간고사 성적은 전 학원에서 영향이 컸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1학년 1학기에는 수학이 1등급이긴 했지만 기말에 성적이 떨어졌고, 2학년 때는 더 떨어져 1등급에서 간당간당하다 2학기에는 2등급으로 내려앉았다.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2학기말 시험 전에 큰 아들을 제외한 나, 아내, 둘째 3명의 가족이 코로나가 걸렸었다.  우리는 별도로 격리되었고, 혼자 식사를 챙겨 먹어야 했던 큰 아들이 밥상(실제는 밥상이 아니고 탁자인데 유리로 되어 있어서 꽤 무거움)을 들고 자기 방으로 옮기려다 손가락이 부러졌다(나중에 검진을 해보니 손가락이 잘 부러지는 병, 갑자기 병명이 생각이 안 남 ㅠㅠ) 기말고사가 2~3주 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안 그래도 성적이 계속 내려가는 시점에서 아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어쨌든 잘 버텨야 해서 아들을 잘 다독이고 손가락 깁스를 한 상태여서 정상적으로 시험을 볼 수 없는 상태여서학교에 문의해 보니 보건실에서 별도로 시험을 봐야 했고, 선생님이 답안을 대신 작성해 주신다고 했다. 수학이 가장 큰 문제였다. 수학성적이 계속 곤두박질치는 상태였기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결과적으로는 잘 선방했다.  점수는 당연히 떨어졌지만 손가락 다친 점을 감안하면 그나마 걱정했던 것보다는 조금 나았다.


이때부터 아들이 수학학원을 계속 다녀야 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오르지 않던 차에 인강으로 공부하는 친구들이 인강의 효과를 긍정적으로 얘기했던 것 같다. 나는 자기 주도적 학습을 주장했었기에 아들을 지지했지만, 그동안 학원에 의존해서 공부해 왔던 터라 걱정이 되기는 했다. 아들의 고민의 시간이 길지는 않았고 인강으로 공부하기로 했다. 다니던 학원에서는 성적이 좋은 편이라 여러 가지로 유혹?을 했지만 아들은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이 결정은 아주 잘한 결정이었다. 아들은 후에 학원을 더 일찍 끊지 못했던 것에 대해 두고두고 후회를 했다. 나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혼자 수학을 공부하면서 수학에 더 빠져들었던 것 같고 대학에 다니는 지금은 수학을 재미있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한다. 불수능이라고 하는 작년 수능에서는 아슬아슬했지만 1등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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