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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 lilla Apr 07. 2023

공부 환경

추억의 기숙사 시절을 회상하며

고3인 큰 아들이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서는 4월 달에는 학교 자습실에서 공부를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코로나 방역이 완화되고 학교에서는 신청자를 대상으로 아침, 저녁 자습실을 운영한다고 했다. 큰 아이는 아침에는 매일 가고, 저녁에는 학원이 없는 이틀만 가능했지만, 해보겠다고 하여 신청을 했고 선정이 되어서 열심히 다니고 있었다. 방학 때는 그렇게 늦게까지 늘어지게 자더니, 첫날부터 우리 부부보다 일찍 일어나 자습실 간다고 분주했다. 아이도 간혹 힘들어 하긴 했지만 공부도 잘 되고 좋다고 하였다.


아내는 아침에 일찍 나가는 큰 아이가 안쓰러웠지만, 스스로 열심히 하려는 모습이 보기 좋아 대견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큰 아이가 자습실을 이용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자습실 이용자는 월별로 신청을 받는 것이었고, 4월 신청자가 많아서 이용일이 1주일에 2일인 학생들 4명은 이용을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2일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추첨한다고 하였다. 큰 아이도 이용일이 2일이라 탈락 대상자가 된 것이다.


큰 아이 말을 들어보니 1, 2학년도 자습실을 사용한다고 했다. 우리 중심적으로 생각하다 보니 3학년이 우선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와 대화를 나누어 상황을 파악한 후, 아내와 얘기를 나누면서 학교에서도 고민을 많이 한 후 결정했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이의 만족도가 높았기에 그냥 포기하기는 뭣해서 담임 선생님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전화를 드렸다. 담임 선생님도 열심히 하는 큰 아이가 대상이 되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고 했다. 1, 2학년 자습실은 1, 2학년이 사용해야 된다고 하였다. 아내는 코로나로 인하여 큰아이 1, 2학년때는 사용을 못했으니 3학년이 이 아이들을 위해서 조금 더 배려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피력했다. 우리도 교사이고 학교 입장도 있으니 이쯤 해서 마무리하자고 했다.


이 일을 겪으면서 나의 학창 시절 공부하던 생각이 났다. 난 집이 읍내에서 4km쯤 떨어진 시골이었다. 중학교 때는 평소에는 공부를 거의 안 하고 시험 때는 학교에 교실을 개방하면 학교에서, 주말이나 방학은 읍내 독서실에서 작은 형을 따라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중학교 때 통학 수단은 자전거였다. 어느 날 형이랑 공부를 하고 나왔는데, 자전거가 없어진 게 아닌가! 형과 나는 한참 찾다가 시내에 버려진 다른 자전거를 타고 왔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자전거를 많이 잃기도 했고, 길거리에 버려진 자전거도 많았다.


고등학교 1학년말 무렵이었다. 학교에서 자습실을 운영한다고 했다. 도서관 건물 1층을 자습실로 개조하고, 예전에 이발관이었던 지하실을 숙소로 개조한다고 했다. 3학년이 되는 선배들 위주로 뽑고, 2학년이 되는 우리들,  그다음 1학년이 되는 입학생 순으로 인원수는 학년별로 조정해서 뽑는다고 했다. 난 아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공부 조금 한다는 내 친한 친구들은 다 선발이 되었다. 그래서 그때 더 소외감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그 해 고1 겨울방학 때 시내 독서실에서 정말 이를 갈고 공부를 했다. 그때 대학생이던 작은 형과 큰 누나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점심 먹는 시간 빼고는 공부만 했다. 수학은 *석, 영어는 *문 기본 영어,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학교 자습실에 선발해주지 않은 선생님들에게 항의라도 하듯이. 영어는 원래 좋아하기도 한 과목이어서 방학이 끝난 후 단어, 숙어 시험에서 내가 제일 성적이 좋다고 해서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자습실에 선발이 안 된 나의 허전함을 달랠 수는 없었다. 1학년 겨울방학 때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고2 때는 국, 영, 수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암기 과목들이 생각보다 성적이 안 나와서 만족스럽지은 않았지만 2학년말에는 자습실에 선정이 되어 고3 때 정말 열심히 했던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자습실과 숙소(지금의 기숙사)에 대해 조금 더 얘기를 해보겠다.  자습실은 독서실처럼 꾸며서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숙소는 정말.. 했다(뭐라고 표현해야할 지 모르겠다). 내가 사용했던 숙소는 육상부가 사용하던 숙소를 사용해서 그나마 조금 나았다. 내가 사용해보지 못했던 고2 때 숙소는 지하실을 개조한 이발관에 매트리스를 깔아 숙소로 사용했다고 친구들에게 들었다. 그리고 당시 옴에 걸린 선배도 있었다고 ㅎㅎ.


밤늦게까지 자습실에서 공부를 하고,  육상부가 사용하던 숙소에서 자고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간다.  집에 가서 아침을 먹고 엄마가 싸준 도시락 두개를 가지고 학교로 다시 등교한다.  수업을 마치고 나처럼 집이 먼 친구들이 자습실에  딸려있는 휴게실 식탁에서  도시락으로 저녁을 같이 먹었다.  이 멤버중 한 명은 판사가 되었고,  다른 한 명은 기자가 되었다.

시내에  가까이 집이 있는 친구들은  걸어서 갔다왔고,  우리보다  집이 더 먼 면 단위  친구들은 학교 앞 식당에서 밥을 사 먹었던  것 같다.


결혼하고 나서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졸업 후 15-17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그 해 추석 때인가 고향에 갔다가, 그때 자습실을 이용했던 친구들과 모교를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정말 우연하게도 교장선생님과 마주쳤는데, 중학교 때 국어를 가르쳤던 은사님이셨다.(내가 다니던 학교는 중, 고 같이 운영되던 사립재단이었다.) 은사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랑하고 싶어셨던지, 우리가 예전에 이용했던 자습실과 숙소(그때는 기숙사로 완전히 당시 현대적 시설을 갖추었다)를 구경시켜주셨는데 정말 깜짝 놀랐다. 자습실 이름(내가 다니던 당시는 맑은 청, 구름 운자를 썼다)도 바뀌었고, 시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더 놀란 건 운영 시스템이었다. 당시처럼 성적순으로 선발을 했고, 전교 1등 좌석과 2,3 등 좌석은 넓게 따로 있었고 시험칠 때마다 성적에 따라 자리가 바뀐다고 했다.


지금 지방에서 명문이라고 불리는 대부분의 고등학교는 기숙사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큰 아이가 중3 때 고등학교 진학을 두고 잠깐 고민을 했었다. 기숙사에 로망이 있던 나는 적극 고려를 했지만, 아이가 건강이 좋지 않아 고민을 오래 하지는 않았다. 지금 고3이 되니 또 미련이 스물스물 올라온다.


나는 교원대를 졸업했는데, 1, 2학년 때 의무 기숙이어서 대학 2년도 기숙사 생활을 했다. 기숙사 생활 얘기하면 몇 날 며칠 밤새워 얘기할 정도로 추억이 많다. 그때 같이 다녔던 동기, 선후배들과의 기억도 각별하다.

이 때의 기숙사 생활은 공부보다는 술과 일탈에 관한 추억이 더 많다 ㅎㅎ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있듯이 공부 환경은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인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열악한 환경이 나에게는  공부에 대한 의지를 더욱 불타게 했던 것 같다. 지금의 아이들이 공부 환경은 훨씬 좋지만 공부에 대한 의지를 스스로 불타게 하는 가?는 어른들이 조금 더 고민을 해야할 것 같다. 공부뿐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의지를 스스로 갖도록 어른들이 환경을 조성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큰 아이의 자습실 문제로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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