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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풍경 Jan 23. 2023

사랑의 기억

안녕달 그림책 [겨울 이불] 북리뷰 


두툼한 할머니의 진홍빛 겨울 이불

겨울의 한기와 대비되는 뜨끈한 장판 속 훈훈한 세상

하염없이 허용되고 품어지던 그 시절, 아동기로의 회귀 

사랑받은 기억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안식처와 다름없다.


겨울 이불/안녕달/창비/2023.01.09.


   기다리던 안녕달 작가의 신작이 청정한 겨울 공기를 품고 독자들에게 찾아왔다. 시골집과 연관된 추억이 있는 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체리빛의 모란 송이가 크게 그려진 예스러운 패턴의 이불을 모티브로 한 [겨울 이불]을 소개한다. 





누구에게나 안식처는 필요하다


유년시절의 추억은 동서고금, 성별과 연령에 상관없이 귀하게 여겨진다. 이들이 그토록 가치롭게 평가되는 이유는 누구에게나 안식처는 필요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우리 모두는 대체로 무력하기 짝이 없는 갓난시절부터 아동기까지, 한없는 사랑을 받으며 성장한다. 그처럼 무조건 사랑받고 허용되는 경험은 인생의 낙심되는 순간 스스로를 놓지 않도록 인간성을 지켜주는 방파제의 역할을 한다. 특히 조부모의 사랑이란, 부모의 것과는 다르게 마냥 넉넉해서 더욱 특별하다. [겨울 이불]은 그런 사랑의 추억을 건드려 마침내 의식 저편의 잠자던 그리움을 깨우기에 특별한 작품이다. 시골집과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겨울잠이 한창인 동물친구들이 등장하는 그림동화 [겨울이불]은 훈훈했던 이전 세대의 향수에 대한 이야기이자, 동심과 조건 없는 사랑의 재경험으로 이끄는 따끈한 초대장이다.



온돌바닥과 이불


이 동화는 겨울이 배경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푸근하다. 이야기는 아이가 눈에 잠긴 집의 마당에 들어서며 시작된다. 엄마가 아닌 할머니, 할아버지를 부르고 툇마루에서 방 안으로 건너오며 발을 딛는 순간 주인공은 "앗, 뜨거워!" 비명을 지르고 만다. 이는 첫 번째 마법의 주문이다.  시골 온돌바닥의 뜨거움은 지글지글 끓는 정도이다. 온도조절에 실패하면 장판마저 까맣게 태우기 십상이다. 아이의 비명은 저도 모르게 발가락을 움찔하게 될 정도의 그 훈기를 떠올리게 한다. 겪어본 이라면 저 주문에 몸에 새겨진 열기의 기억이 순식간에 소환될 것이다. 곧이어 작가는 할머니의 겨울 이불, 커다란 진분홍 꽃송이의 문양을 보여주며 독자의 추억 중추를 톡톡 건든다. 가장 뜨끈한 아랫목에 펼쳐 있는 이불로 한 발 한 발 다가가며 아이가 차례로 벗어던져 놓은 겉옷의 행적을 쫓다 보면 결국 이불을 들치고 내복차림의 몸을 밀어놓는 아이와 함께 작가가 초대하는 동화세상 속으로 동반입장하고야 마는 것이다.



계란 한 판과 식혜


할머니의 이불속은 현실과 동화가 뒤섞인 유쾌하고 다감한 세계이다. 개구리와 너구리, 곰과 거북이가 어울리며 밀감을 까먹고, 수다를 떠는 찜질방의 풍경은 낯선 듯 익숙하다. 뜨끈한 바닥 이편저편 뱀과 고슴도치, 다람쥐와 두더지가 동면하듯 널브러져 있다. 가장 안쪽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식혜와 고구마를 간식 삼아 즐기며 '우리 강아지'를 반겨준다. 찜질방의 대표 먹거리인 식혜를 쭈욱 빨아들이는 조부모의 확대컷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아이처럼 독자의 입 안에도 단숨에 침이 고인다. 미각은 추억을 불러일으키기에 훌륭한 도구이다. 식혜의 달큰하면서도 구수한 맛이 혀끝에 감도는 듯한 착각이 드는 순간, 작가가 제안한 초대의 지평은 단숨에 계란장수가 골목길을 돌아다니고 얼어붙은 강 위에서 썰매를 타고 놀던 이전 시대로까지 넓어진다. 책장 속에서 카운터의 곰이 지키고 있는 구운 계란 한 판은 바둑판처럼 촘촘한 골목길로 변해 그 사이를 계란차와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누빈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수다 떠는 동네 주민들이 모퉁이에 자리한 그 모습은 정겹다. 흰곰이 식혜를 떠 주려고 젖힌 이불깃 아래에서 등장하는 것은 밥알이 눈송이처럼 떠다니는 얼음강이다. 식혜 옹기 안의 작은 세상에서 심연의 가라앉았던 다정함과 그리움을 길어 올리듯 국자가 마법같이 길어지며 얼음층 아래에서 달큰한 음료를 쑥쑥 퍼올린다.


혼자가 아니다


간식을 먹고 나누는 자리는 웃음꽃이 만발한다. 아이는 자신보다는 배고픈 다람쥐의 입에 우선 간식을 물려주고, 할머니가 다정스레 아이의 입에 쏙 물려주는 흰 달걀의 말랑함만큼이나 이불속 찜질방의 분위기는 부드럽고 명랑하다. 배도 부르겠다, 따뜻한 바닥에 누워 무릎베개를 한 손주의 이마를 거슬한 할머니의 손이 쓸어준다. 주름지고 거친 손이 어린 머리칼을 쓰다듬는 컷에서 독자마다 그리운 손길을 떠올릴 것이다. 지은이는 부드럽고 푸근한 그림체 속에 수많은 실마리를 숨겨놓았다. 모든 힌트는 독자가 저마다 소중히 간직해 온 추억의 유산을 돌이켜볼 수 있도록 돕는 안내 장치이다. 그렇게  그림책 한 권을 읽는 동안만이라도, 든든하고 푸근한 심정이 되길 바랐던 것이 아닐까. 잠들기 전 마지막 아이의 시선에 가득했던 할머니의 인자한 미소는 안녕달 작가가 읽는 이에게 보내는 편지 같기도 하다. 이 모든 것과 동물친구들의 어우렁더우렁 함께 하는 웃음소리까지 더해져 그림책이건만 합창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다. "모든 사람은 혼자일 수 없다. 혼자가 아니다"라고.



온기는 번진다


겨울의 한기는 현실적인 삶의 온도이다. 열심과 경쟁이 당연시되는 생계 현장의 기온은 냉랭하다. 주인공의 아빠는 그렇게 하루를 차게 보낸 후 추위를 거슬러 연기와 불빛이 배어 나오는 마당에 들어선다. 그가 냉기를 휘감고 방안에 들어서면 노부부가 내미는 것은 아랫목 포근한 이불속에 묻어 놓은 밥 한 공기이다. 앉은뱅이 상위에 펼쳐진 염려와 다정함은 뜨끈한 밥 한술 위에 할아버지가 슬쩍 떼어 올려놓은 고등어 살 한 점처럼 배부르게 기름지다. 일터에서 돌아온 자녀에게 고령의 부모가 던지는 "밥은 먹고 다녀야지"라는 심상한 한 마디는 안쓰러움, 듬직함, 염려, 고마움과 격려의 마음이 그득 눌려 담겨있다. 잠이 폭 든 아이에게 점퍼를 둘러 씌워 업고 가는 부친의 모습이 포근포근 내려앉는 눈송이와 하얀 입김 덕분에 시려 보이지 않는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이, 아이가 품고 있는 애정과 녹아내린 아비의 심정이 하나가 되어 이윽고 독자들에게까지 내려앉을 것이다. 마지막 장 그의 독백 한 마디에서 알 수 있듯이 온기란 번져나가는 것이기에, 나 역시 따라 해본다. 



애가 몸이 참 따끈하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지극히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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