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서후 Aug 04. 2021

눈앞에서 만난 기적의 존재

뜻밖의 만남, <스크룬하이>

2018년. 꿈에서 본 이야기의 서문을 반 정도 쓰고 나서 일 년 남짓의 시간이 흘렀다.      


아직 직장 생활을 하며 희망을 얻기 전이어서 그런지, 그때도 스위스 유학생으로서의 삶은 여전히 재미가 없었나 보다. 예전에 썼던 일기를 보니 이런 내용이 적혀있다.      


주말 아침. 비가 온다. 보슬보슬 오는 게 아니라 부슬부슬, 아주 기분 나쁘게 온다. 날씨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이렇게 을씨년스러운데, 우울증에 안 걸리는 게 더 용하다. 게다가 요즘 왜 이렇게 바쁜지 모르겠다. 하는 일은 별로 보람 있지도 않은데 시간은 너무 금방 간다.     

아무튼 모처럼 시간이 났으니, 예전에 쓰던 이야기의 서문이라도 마무리해 봐야겠다. 꿈속에 나왔던 신비한 존재의 이름을 인터넷에 쳐 봤는데 도통 나오지를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단어의 조합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스크룬하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당시 서문이라도 온전히 써 보려고 노력했던 나는, 다시 ‘이야기를 펼치며’를 열고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예전에 썼던 글이지만 아직도 꿈속에서 보았던 풍경이 생생히 떠올랐다. 이야기들의 나무, 그리고 그때 만났던 그 거대한 존재의 모습도.


‘신기하네. 일 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생생하게 기억나네. <스크룬하이>라는 그 이름.’


서문 아래에는 내가 꿈에서 봤던 것을 적어놓은 메모가 보였다.


···이것은 기적에 대한 이야기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진리와, 고통을 딛고 이겨낸 이들이 맞이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전설이다. 나는 <스크룬하이>가 전하는 이야기에서 똑똑히 보았다. 스스로 초월의 주인공이 되어 변혁과 변화를 이끌어 내는 사람들의 힘을. 그렇기에 나는 이야기 여행자로서 반드시 이 메시지를 세상에 전할 것이다. 우리가 기적의 중심에 있음을 알리기 위해.


'흠. 다짐까지 써 놓다니. 이때 꿈 내용에 엄청 몰입했나 보구나. 그래, 서문에는 내가 만난 존재에 대한 얘기를 좀 더 담아보는 게 좋겠어. 이왕 전하기로 마음먹은 거, 제대로 해 봐야지. 최대한 꿈에서 본 걸 그대로 살려서 써 보자.'


그렇게 해서 나는 <스크룬하이>의 이름을 그대로 서문에 박아 넣었다. 아래의 글처럼.


  (···) 아무튼 내가 이 이야기들의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건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스크룬하이’라는 젊은 모크샤에 대한 것인데, 내가 마침 그 전설의 주인공을 만나는 영광을 누렸으니 어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고로 어떤 이들은 모크샤라는 신성한 존재가 고대 용의 후손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내가 실제로 보니 오히려 불사조나 동방의 붕새 (‘장자’의 소요유 편에 나오는 전설 속의 새)를 닮은 것도 같았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참아낼 수 없는 것을 참아 내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만 진정한 모크샤가 될 수 있다고 하던데. 도대체 어떤 일들이 있었길래? 나는 궁금증을 견딜 수 없어 그의 위엄이 주는 두려움을 삼키고 사정을 묻기로 했다.


  난생처음 모크샤의 장대한 모습을 본 그 순간은 아직도 생생히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는 이야기들의 나무 맨 꼭대기 가지에 조용히 앉아, 자줏빛과 황금색이 오묘한 무늬를 이룬 부리로 금강석같이 첨예하고 찬란한 겉 비늘과 진주처럼 온화하게 빛나는 속 깃털들을 다듬고 있었다. 그의 모든 움직임은 마치 솔잎에 이는 바람처럼 조용했다. 아마 무도회에 한창 정신이 팔려 있었던 다른 이야기들은 그가 이 나무에 왔는지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때마침 나는 나무 꼭대기 층에 있던 작은 방에 머물러 있었기에 그를 마주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모크샤가 바로 내 눈앞에 있다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가,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타오르는 흑갈색 불꽃과 같이 아득한 그의 두 눈동자란! 정말이지, 그가 나를 바라봤을 때처럼 심장이 떨렸을 때도 없었을 것이다.


  다른 이야기들로부터 익히 들어와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모크샤 자체가 정말 드물게 나타나는 존재인 만큼 역시 그가 자신의 세상에 출현한 이야기 또한 범상치는 않았다. 다른 시간과 공간을 여행할 수 있는 전설적인 존재답게, 그는 이야기를 펼치는 방식 또한 남달랐다. 나는 황송하게도 그의 부리에 손을 얹는 영광을 누렸고, 그는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촤르르 열리는 그의 겉 비늘이 마치 일렁이는 파도에 반짝이며 부서지는 달빛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그 강렬한 빛에 나도 모르게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바로 그 찰나, 나는 감은 두 눈으로 정말이지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젊은 모크샤가 살아온 그 엄청난 나날들을. 스크룬하이가 날개를 펼치는 순간에 나의 의식은 이미 그의 생이 있었던 시간과 공간에 다녀왔던 것이다. 그건 말이 필요 없는 이야기였으며, 그것이 그가 이야기하는 방식이었다.


  내가 체험한 그의 역사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 것인지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내가 이야기들의 나무에서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오로지 날갯짓을 한 번 했을 뿐이었다. 경이로워하는 나의 얼굴을 보고 그는 웃으며 (적어도 나는 그가 웃는다고 느꼈는데) 시간은 상대적인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세상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여행자’이며 진실되어 보이기에 그의 기억에 초대한 것이라고 했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의 이야기를 다른 이들에게도 전하겠다고 약속했다.


  새벽달이 빽빽한 나뭇잎들을 푸르게 비추고, 그가 마침내 저 수평선 너머로 날아올라야 할 시간이 올 때까지, 나와 스크룬하이는 호기심 많은 별들이 빛나는 밤을 끝없는 이야기들로 수놓았다. 그가 덧붙여 이야기해 준, 고대로부터 활약해 온 예전 백일곱의 모크샤들의 전설들만 하더라도 어찌나 대단하던지! 하지만 지금은 내가 난생처음 만난 108번째 모크샤, ‘스크룬하이’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이니 그건 다음 세상의 달이 뜰 때 이어 나가도록 하겠다.



꿈에서 본 내용을 서문으로 쓰면서부터, 나에게는 신기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우연을 가장한 소소한 기적처럼 딱 알맞은 영감들이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모크샤'라는 고대의 산스크리트어를 접하게 된 것서부터 그렇다.


'오오, 정말 이 이야기를 전하는 걸 신이 도우시려나?'


다음 글에서는 신 역할을 가장 많이 맡은 배우라는 모건 프리먼 아저씨를 통해 받은 우연한 영감에 대해 적어보겠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스크룬하이>의 이야기와 함께.


다음 글: 신이 떠난 세상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천 개의 강에 천 개의 달이 뜨는 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