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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후 Jul 30. 2021

천 개의 강에 천 개의 달이 뜨는 밤

'이야기들의 나무'에서 만난 신비한 이야기

“헉, 대박. 무슨 이런 꿈이….”     


때는 2017년 2월의 어느 새벽. 눈을 뜨자마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하도 어렸을 때부터 이상한 꿈들과 자각몽들을 꾸며 단련이 되어있기는 했지만, 그토록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서사를 가진 꿈을 만나는 건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무슨 영화를 한 편 보고 극장에서 나온 것처럼 가슴이 둥둥 뛰었다. 어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잤길래 이런 꿈을 꿨지?


'희한하네. 분명히 케밥 먹을 생각하면서 잔 거 같은데? 왜 난데없이 신과 피조물과 천 년에 한 번씩 깨어나는 신성한 존재와 세상의 이치에 대한 엄청난 이야기가 나타난 거지?'


보통 이런 꿈을 꾸면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말했을 텐데, 당시 스위스에서 홀로 유학 중이던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우선은 짤막하게라도 줄거리를 써 놔야겠다는 생각에 노트북을 켜고, 내가 보고 느낀 그대로 써 보기로 했다. 일단 내가 이 이야기를 알게 그 희한한 장소부터.

    

아래는 그때 내가 써 놓은 메모의 일부다. (약간 잠에서 덜 깼는지, 의식의 흐름대로 쓴 듯하다.)


<천 개의 강에 천 개의 달이 뜨는 밤>

주위를 둘러보니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나무 안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서는 모든 존재들이 '이야기'라고 불렸다. 알고 보니 나는 그 나무의 단골 여행자였다. 그리고 아주 운 좋게도 오늘, 천 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한다는 어떤 신성한 존재를 만나게 되었다. 그 전설적인 존재는 내게 아주 희한한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이 메모를 토대로, 나는 그날 무작정 서문부터 써 보기 시작했다. 


'음…. 서문 제목은 <이야기를 펼치며>가 좋겠다. 내가 이야기들의 나무에서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형식으로 써 보는 거지.' 


학교 갈 준비도 하지 않고, 나는 들뜬 마음으로 대충 이런 식으로 서문을 적어 내렸다. 



이야기를 펼치며


천 개의 강에 천 개의 달이 뜨는 밤이면, 나는 이야기들의 나무로 향한다. 그곳에서는 어찌나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지는지! 이 세상 각지에서 모인 이야기들이 밤새도록 무도회를 벌이면서 향기로운 음료를 마시며, 지칠 줄 모르고 자기 삶에 대한 수다로 거대한 나무속의 공간을 가득 채운다. 단 한 번도 같은 선율이 반복되는 법이 없는 현란한 음악 속에서 이미 사라져 버린 이야기들, 지금까지도 되풀이되는 이야기들, 아직 시작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서로를 만나고 또 다른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 그 풍경이란! 정말, 나같이 솜씨 없는 평범한 이가 그걸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이야기들이 도대체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냐고? 그야 제각기 다 나름의 방법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들처럼, 그들에게도 형태와 특징이 있다. 어떤 이야기는 그저 평범한 요정이거나 아름다운 반인 반수의 모습이고, 어떤 이야기는 동그란 단추 모양이며, 또 어떤 이야기는 펠트 천으로 짜인 인형이거나 몇천 년은 되었을 것 같은 바위의 부조 같으며, 송홧가루로 이루어져서 뭉치고, 흩어지기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있다. 어떤 이야기들은 심지어 동물인지, 식물인지 구별조차 되지 않는다. 몸집이 대왕 고래보다 몇 곱절은 큰 이야기도 있고, 생쥐의 눈보다 작은 이야기들도 있다. 그러니 상상할 수 있는 온갖 크기와 모양을 갖춘 그들이 한꺼번에 모이는 이야기들의 나무는 또 얼마나 웅장하고 거대하겠는가! 그 신비로운 장소에 깃든 마법에 대해 말하려면 입만 아플 것이다.


빛도 어둠도 없는 우주와 같은 공간에 자리한 이야기들의 나무는 마치 거대한 섬 같다. 수천 가지처럼 내려있는 그 뿌리들 하나하나가 닿는 곳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커다란 강줄기가 흐르고, 수만 줄기로 뻗어있는 우람한 가지마다 초승달부터 그믐달까지 가지각색의 시간을 나타내는 이 세상의 모든 달들이 걸려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말하는 ‘세상’의 의미가 단순히 우리네 세상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거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고 알지 못하는 모든 시간과 공간의 조합은 모두 각기 또 다른 세상들이다.


그럼 그 무수한 세상들에서 온 이야기들이 어디서 만나 서로를 알아갈 수 있을까? 바로 이 이야기들의 나무에서다! 속이 텅 비어있는 거대한 나무의 기둥 속에는 별빛으로 수놓아진 등불이 영원히 반짝이며 연회장을 밝힌다. 그 한복판에서 서로가 어울려 신나게 춤을 추다가 지친 이야기들은 비로소 쉴 곳을 찾는다. 그들은 요상한 모양으로 튀어나온 기둥 안쪽 옹이들을 탁자 삼고, 그 아래 가장자리를 빙 둘러서 늘어진 덩굴 뿌리를 의자 삼아서 끼리끼리 모여 앉는다. 그리곤 마치 피로를 잊은 듯이 목을 축이며 한바탕 수다 꽃을 피우는 것이다. 그러다가 하품을 하며 좀 조용한 곳에서 쉬고 싶어진 이야기들은 나무 꼭대기로 향하는 층계를 층층이 올라가, ‘방’이라고 불리는 작은 구멍들로 들어가기도 한다. 이곳을 찾는 단골 이야기들만 아는 표현으로, 이러한 모든 시간은 ‘천 개의 강에 천 개의 달이 뜨는 밤’이라고 불린다.



이런. 신나서 쓰다 보니까 학교에 지각할 것 같았다.

'아따, 제일 중요한 건 쓰지도 못했는데! 내가 만난 신비한 존재에 대해서는 시간 날 때 이어 써야겠다.'


하지만 시간 날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결국 딱 저만큼 쓰고 나서 한 일 년간은 손을 못 댔던 것 같다. 내가 '이야기들의 나무'에서 만난 신비한 존재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천 개의 강에 천개의 달이 뜨던 그 밤의 기억을 더듬어, 다음 글에서 그 이야기를 이어 가겠다. 


(매주 수요일, 금요일에 만나요^^!)


다음 글: 눈앞에서 만난 기적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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