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감상법을 기록하기에 앞서
<레드북>이라는 창작 뮤지컬이 있다. 우리나라의 창작진이 만든 작품이고, 여성의 사회진출과 자기표현에 보수적이었던 19세기 후반의 런던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주인공인 안나 노크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그 감정을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인물로, 이런 성격 때문에 인생 초반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과거 어느 고상한 노부인의 하녀로 일을 할 때 부인으로부터 “이야기를 들려주렴”이란 부탁을 들어주곤 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안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길을 걷게 된다. <레드북>은 안나가 자기 인생을 살며 갖은 고난들을 겪으면서도,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갖고 있는 작가의 재능과 의무를 깨달으며 독자들에게 삶의 기쁨을 찾아주는 ‘레드북’의 작가로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그 후에도 여전히 욕망하고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2018년 봄에 나는 이 극을 처음 만났고, 보고 난 후 여러모로 충격을 받았다. 생동감 있는 인물과 이야기가 주는 쾌감, 배우들의 호연, 멋진 멜로디와 오케스트라의 화려한 연주, 각 넘버들의 진솔한 가사들을 뒤로하고 가슴에 어떤 일렁임같은 게 멈추지 않았다. 보통 뮤지컬을 보고 나면 ‘어떤 점이 좋았지? 이 장면이 최고였어, 배우들은 정말 대단해, 오늘도 앙상블이 끝내줬어, 오늘 공연은 이런 점이 특별했으니까 기억해둬야지’ 같은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 뮤지컬을 보고 난 뒤에는 극이 갖고 있던 내용보다는 극이 내게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가 머릿속을 가득 울렸다. ‘그러니까 극 말고, 너 자신에 대해 말해봐’라고 명령을 받은 것 같았다.
<레드북>은 관객이 스스로에 대해 말하기를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극이다. 마치 그것이 이 극의 존재 이유라는 듯. 극의 어떤 장면에서도 이런 주장이 전면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게 무엇인지 뚜렷하게 설명하기는 곤란하지만, 다소 뻔할 수 있는 이런 이야기가 하고 있는 강렬한 자기주장은 경이로웠다. 뮤지컬의 마술일까. 스스로 나 자신일 수 없었던 경험과 반대로 온전히 나 자신이었던 경험, 그때 돌아왔던 타인들의 반응과 내 마음을 침범했던 좋았고 나빴던 느낌, 언젠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을 때의 감정, 들어야 했지만 스쳐 지나갔던 누군가의 중요한 이야기 같은 과거의 일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지나가며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여느 평론가들처럼 극의 가치와 장단점을 따지고 들 건지, 아니면 극이 내게 준 것들을 온전히 받아들여 내 삶으로 데리고 가는 온전한 관객이 될 건지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으로 느껴졌다.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과 느끼는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다면 나는 대체로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아왔고, 내 몸의 90%는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뮤지컬은 그렇게 생각만 많았던 사람이 스스로 '느낄' 수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중요한 기회였다. 생각하는 사람이 객석에 앉아 뮤지컬을 보고 있으면 좀 혼란스럽다. 그 시간 동안 내가 다른 공간에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을 설명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그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 때문에 같은 작품을 계속해서 보고 또 보고 잡아내려고 애쓰기도 한다. 이게 뭐지?라는 물음표를 뚫고 이 느낌의 정체를 알아내고 설명해내야 직성이 풀린다. 생각하는 인간의 또 다른 함정은 자칫하면 자기도 모르게 비평가가 된다는 것인데, 이렇게 모든 감각을 깨우고 나를 사로잡는 아름다운 무언가 앞에서 팔짱을 끼고 비평가로 앉아있는 것은 몹시 불행한 일이다. 온전히 관객이 되는 것이 가장 좋다. 극장을 나오면 많은 것을 적고 또 적는다. 문제는 언어가 닿지 않는 부분이다. 언어가 경험을 넘어서기란 쉽지 않다. 비평가의 시선을 거두고, 뮤지컬에 대해 계속 쓰다 보면, 그렇게 쓴 글을 스스로 읽다 보면 작품보다는 그 작품을 보는 내가 보인다. 작품에 대한 이해도 커지지만, 나 자신에 대한 이해도 같이 성장한다. 내가 쓴 것을 의심하고 있는 자에게 <레드북>의 명령을 필연적이기도 하다. "너를 말하라".
많은 경우 뮤지컬 작품은 스스로 온전한 원작이 아니다. 모티브가 되는 최초의 소스가 있고, 팀으로 이루어진 뮤지컬 창작자의 적극적인 해석이 반영된 예술이다. 동시에 대중들에게 선보이고자 하므로 화려하게 관객의 눈을 속이면서도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장치를 심어두었다. 뮤지컬 감상의 묘미는 거기에 있다. 시간이 꽤 흐른 원작에 개입한 현대인의 해석과 변주, 어떤 부분은 그대로 두고 어떤 부분은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바꾸어낸다. 초심자들이 사람들이 자신들이 본 원작 소설이나 영화를 생각하고 뮤지컬을 보러 갔다가 당황하게 되는 건 이 지점이 아닐까. 여기서 노래를 부르고, 여기서 대사를 하고, 또 갑자기 춤을 추는 데에도 나름의 맥락이 있다.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뮤지컬은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 공간과 시간 모두 누군가들의 적극적인 해석이 닿지 않는 부분이 없다. 충분히 많은 극을 보고 마니아가 된 이후에 가장 신기했던 점은, 심지어 공연을 하고 있는 중에도, 시간과 공간에 닿아 뉘앙스가 바뀌고 해석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가장 마법 같은 부분이다.
그렇게 뮤지컬을 감상하고 난 후, 그가 전해준 이야기가 나라는 관객을 만나 새롭게 이야기가 구성될 때, 내 안에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때 가장 큰 환희를 느낀다. 뮤지컬이 완성되는 순간은 저 무대에서 커튼콜이 펼쳐지는 장면보다는, 잠시 뮤지컬로 여행을 떠났던 낯선 자아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원래의 나와 만나 어땠냐고 묻는 순간이다. 그래서 뮤지컬에 대해 쓰는 건, 나만의 레드북을 써내는 것과 같은 일이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말해야만 했고, 말했기 때문에 가치 있는 일. 어떤 사람은 단호하게 '불호'를 외치겠지만. 그 불호 속에 우리의 다양성이 있고, 당장 '너를 말하라'는 명령이 되돌아갈 테니. 감히 내 글이 <레드북>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알고 느끼고 욕망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읽는 사람도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그게 뮤지컬 공연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본질적인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각자 시끄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도 그것이 조화를 이루고 다채로운 색상으로 감동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 것. 제목인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은 뮤지컬 <레드북>에서 가장 중요한 넘버의 제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