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뮤지컬 헤드윅과 관련해 원고를 하나 작성할 일이 있었고, 그래서 이 작품을 다시 한 번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정말 많은 메모가 작성되었지만 2/3은 글의 주제와 맞지 않아서 원고에 쓰지 못했다. 그래도 적어두고 싶은 내용들. 상당히 많아서 원래는 하나의 글로 쓸 생각이었는데, 글에 집중할 여유가 안된다. 그래서 단상.
이번에 헤드윅 보면서 제일 많이 생각한 건, 헤드윅은 스스로를 어떻게 정체화하고 있을까.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던 여자? 여자의 몸에 갇힌 남자? 아니면 자기자신의 정체성에 관심 없는 사람? 헤드윅은 이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는 캐릭터는 아닌데, 아무래도 이 캐릭터의 독특함과 이질감을 받아들여야 하는 관객으로서는 자기가 원래 갖고 있던 프레임으로 어떻게든 해석해보려고 하는 오랜 습관을 쉽게 내버릴 수 없다. 나의 이해에 들어오길 바라는 마음.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고 싶은 욕망이 타자화와 혐오를 만든다. 나름의 방식으로 그를 이해하고 설명하게 될 때 피하기 힘든 위험이 타자화고, 그 이해에 그가 쉽게 들어오지 않을 경우 자극에 지친 뇌는 혐오를 만들어내기 마련.
공연은 그래서 생각할 거리가 된다. 실존인물을 타자화할 위험으로부터는 떨어져있는 공연장이라는 공간에서, 그저 이야기를 들을 뿐인 안전지대에 앉아있을 수 있다. 배우가 연기하는 그 인물이 이야기 속에 서있기 때문에, 또 쉽게 관객은 자기 자신을 주인공에게 이입시킬 수도 있다. 이번 공연에서 내가 이입한 헤드윅의 정체성은 여성성을 강요받은 남자. 호모섹슈얼이다. 내가 언니라고 부르고 누나라고 부르는데 그 언니는/누나는 나의 호칭에 디스포리아를 느낀다. 본인이 원해서 갖게 된 성별이 아니다. 예전에는 어렴풋이 MTF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본 헤드윅은 FTM이었다. 굉장히 (원래 태어난 대로) 남자이길 바라는 여자.
여기서 '여성성'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한다. 헤드윅이 자신을 완전하게 해줄 짝이라고 믿었던 루터와 토미는 헤드윅이 '여성'이기를 요구한다. 루터는 기득권자로서 , 토미는 숭배하는 대상으로서 상대가 '여성'으로 남아주기를 기대하는 인물들. 한셀에게 이름을 물려준 그의 엄마 헤드윅 슈미트는 권력을 혐오하는 뉘앙스의 말을 했는데, 마치 권력을 가져본 적이 있거나 원하면 가질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헤드윅은 그 말에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헤드윅이 처음으로 권력의 맛을 느낀 건 루터가 욕망에 불타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다. 그 맛은 엄마가 겁줬던 것과는 달리 예상을 뛰어넘게 달콤했던 걸. 하지만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권력은 더이상 상대가 나를 욕망하지 않는 것으로 아주 쉽게 무너진다. 부패할 여지조차 없이 아무것도 없이 그저 사라진다. 그것은 진짜 권력이 아니니까.
헤드윅에서 제일 복잡한 마음이 드는 넘버는 Wig In A Box, 헤드윅의 여성으로서의 자의식, 여성성에 대한 생각을 들을 수 있다. 앞에 꽤나 아름다운 가발과 메이크업상자가 놓여져 있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멋진 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이 모든 것은 '너를 위해' 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나는 그 가발과 메이크업을 쓸 수도 있고 쓰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내가 그것을 해야만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네가 내 곁에서 나를 사랑해야만 내가 완전해질 수 있다면. 내게 그것을 안할 자유가 있는 것일까. 이런 복잡한 질문은 때려치우고, 그냥 이 가발과 메이크업, 나 자신의 아름다움을 즐겨도 될까.
헤드윅은 이런 질문을 직접 쏟아내지는 않는다. 꿀꿀할 때 A side의 음악 몇 곡으로 기분을 전환하는 것 마냥, 아름다운 여자로 변신하는 즐거움을 노래하고, 그 끝에 이게 다 '너를 위해서' 라고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을 쏟아낼 뿐이다. 알 수 없다. 노골적인 사랑의 조건들 앞에선 강인한 인간도 나약하기 쉽다.
헤드윅 나중에는 어떻게 되지? 가발의 갯수만큼이나 조각난 자신. 그것을 주워 기워도 그냥 아름다운 시체일뿐, 나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것을 계속 슬퍼하다가 결국 가발도, 드레스도 다 집어던짐. 여자여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헤드윅에게 얼마나 큰 과제였는지. 여자인 것이 완전히 싫었다기보다, 그 수동성과 타자성이 힘든 일이었지. 나중에 Midnight Radio 에서 이름이 불려지는 가수들은 왜 다 여성으로 알려진 사람들일까. 헤드윅은 트랜스젠더라서 타자였나, 여성성을 강요받고 있어서 타자였나. 둘 다. 그래서 헤드윅은 트렌스젠더의 서사, 여성혐오 안에서 생존하는 여성의 서사 둘 다로 해석해낼 수 있는 이야기가 됨. 여자라는 이름으로 빼앗긴 인간성 같은 것. 모든 권력을 다 남에게 빼앗긴 사람.
절대권력은 반드시 망하니 약자로 살아야한다는 엄마의 신념을 이식이라도 받은 듯. 헤드윅은 평생을 약자로 살아야 했다. 왜냐하면, 신의 피조물을 사랑했기 때문에. 권력은 기껏, 욕망의 대상이 되었을 때 잠깐 착각. 헤드윅은 왜 그렇게 날카롭고 짜증이 많은 사람이 되었을까. 다른 수많은 여성들처럼. 나는 나로서 존재하는데, 왜 자꾸 누군가의 대상이 되어야하는가. 주체적으로 대상이 되기를 강요받는가. 그것이 너무나 이상한 일.
헤드윅의 권력을 논하고자 한다면. 이츠학을 또 빼놓을 수 없는데. 이츠학은 헤드윅과 비교해 명백한 약자. 자기가 유일하게 강자이고 작은 권력을 부릴 수 있는 대상. 자신과 같은 이민자. 자기가 어렵게 얻은 것을 후배? 후임?에게 쉽게 주고 싶어하지 않는 헤드윅 자신의 고집, "자유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른다"는 말은 권력이 있는 자의 언어. 자신이 여성이 되기를 강요받았던 것과는 달리, 이츠학은 여성으로 꾸미지 않는 것을 강요당하고. 아이러니. 결국은 꼰대가 된다? 꼰대도 변할 수 있다?
영문가사를 다시 찾아 보는데 Wicked Little Town 번안 아쉽다. Long Grift에서 Midnight Radio까지 후반부 가사 번안이 전반적으로 맘에 안듬. 20년 전에는 우회하기 위해서 그랬다고는 생각하나. 고질적으로 뜬구름잡는, 현학적인 번역을 좋은 번역이라고 느끼는 일반감각같기도 하고. 하지만 헤드윅만큼 손에 잡힐만한 구체성을 구현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작품도 없는데. 개인적으로는 제목도 모두 우리말로 바꿔줘야한다고 보고. Wicked Little Town의 주제인 '나의 목소리/나의 노래'를 듣고 그 삭막하고 차가운 도시를 살아서 건너가라는 메세지가 잘 드러나는 가사는 아닌 것. Reprise에서 토미가 '네 목소리를 듣고 난 잘 건너왔는데, 왜 너는 아직 거기있는 거야, 지금이라도 내 목소리를 듣고 건너와 나의 옆으로'라는 답장도 잘 전달되어야 하고. Midnight Radio까지 이어져, 너의 목소리가 되어줄 한밤중의 라디오, 세상에 반항했던,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던 이 락큰롤을 듣고, 내 목소리를 듣고 알게 되길, 손을 들어 네가 스스로 온전한 사람이라는 걸 말하고, 너 자신이 되라고. 세상의 모든 이질적인 존재/부적격자들에게 세상과 내가 맞지 않다고 느끼는 그 모든 순간에도 네가 들을 목소리가 여기 있다고.
Angry Inch. 헤드윅 자신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앵그리인치. 해체된 조각들 속에서 유일하게 나라고 할 수 있는 것. 그마저도 내가 아닌 것.
Origin of Love 는 호모가2/3, 헤테로가1/3인 세계라는 게 재미있다. 사랑의 기원은 불안, 사랑은 타자에 대한 마음.
뮤지컬의 클래식이 되어버린 헤드윅. 그래서 이젠 오히려 (본 적은 없지만) 원형인 드랙쇼 느낌이 나는 것도 같다. 처음 뮤지컬이 되었을 때에는 얼마나 신선하고 반항적이었을까. 시대에 불화하는 헤드윅의 느낌이 있었을까. 25주년을 향해 가고 있는 지금은 너무나 클래식. 계속 새로운 이들에게 발견될 수 있어야 하고, 젊은 배우들이 계속해서 필요할테고.
언젠가 수명이 다할지도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그래도 꽤 남아있는 수명. 1세계의 사정은 내가 잘 모르겠고, 우리나라의 사정은 여전히 이질적인 헤드윅일까. 헤드윅이 잘 팔리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헤드윅이 계속해서 타자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가끔은 너무 타자의 느낌으로 예쁜 헤드윅에 현혹되는 느낌도 있었는데. 그런데 이번 헤드윅은 그런 느낌이 덜했다. 내가 공연과 좀 거리를 둬서일 수도 있고 (다른 관객들의 반응을 거의 안보기 때문에), 순수해보이는 젊은 배우 덕일 수도 있고 이번 프로덕션의 전체적인 톤일수도 있고. 아니면 배우나 연출의 의도와 관계없이 관객3인 내가 또 혼자 급발진 했나. 코로나 시국의 영향이 있다. 보통은 정말 흥분해서 카타르시스를 맞이하고 속의 숨을 다 뱉어내고 돌아오는 공연인데. 차분하게 극의 흐름에 대해, 캐릭터에 대해 생각할 공간이 충분히 있었다는 게, 이렇게 이것저것 적어낼 여유를 준 것 같기도 하다. 이 시국에 헤드윅을 올린다라, 프로덕션이 고민을 많이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고.
사실 언젠가는 여자배우가 헤드윅을 하는 걸 보게 되기를 오랫동안 바라왔는데, 그런 바람은 이번 공연을 보면서 조금은 사그라 든 것도 같다. 과장된 여성성?을 연기하는, 사람들이 보통 히스테리아라고 부르는 상태를 표현하는 여성연기자를 보는 것이 이중의 고통이 되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물론 헤드윅 넘버를 커버하는 여자배우들은 늘 옳다. 커튼콜에서 이츠학이 헤드윅의 노래를 부르는 카타르시스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배역을 쓰기보다, 현 세계에서 헤드윅이 맞이한 해방을 느끼는 배우들을 보고 싶은 것 같다. 항상 따라올 목소리가 되어주고 싶다고 생각하지. 헤드윅을 하는 여자배우, 보고싶고, 보고싶지 않고.
어쨌거나 헤드윅. 네가 무엇이든 스스로를 위해서 즐겁게 가발을 쓸 수 있는 날도 맞이할 수 있길. 그런 기도를 하게 되었던.
* 다 옮겨적고 나서 생각해보니 헤드윅이 가진 '이민자'의 서사도 길게 이야기해 볼 거리가 있다. 사실 보면서 최근에 읽은 소설 <파친코> 생각도 많이 났다. 이건 다음 기회에. 경계에 선 사람들이, 거기에 같이 서려고 하는 사람들이 결국은 그 경계를 다 지워갈 거라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