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건 익숙합니다.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보이지 않는 도로 끝 어디선가부터 울리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경찰차가 시야에서 벗어난 후에도 귓속을 아프게 후볐다. 경찰차가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내 심장과 귀 통증은 멈추지 않았다. 통증과 함께 귀가한 나는 그 날의 일기장을 꺼냈다. 그 날은 내게 악몽 같은 날이다.
2020년 1월 15일 수요일 제목 : 차라리 악몽이었으면 어땠을까?
난 단지, 학원을 미루고 애인과 놀고싶었을뿐인데. 핸드폰과 전자기기를 모두 다 빼앗기고, 외출금지명령도 받았다. 내가 지정성별 ‘여성’을 만나서 그런걸까? 오늘 일어난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난 애인이 학원을 안간다는 말에 애인과 집에서 놀기로 했다. 놀고 난 뒤 바로 학원으로 향했다. 학원을 갔다오고나서 부친의 요청에 핸드폰을 냈다. 숙제를 못해갔다는 말에 핸드폰을 갑자기 검사하기 시작한 부친은 애인과 내가 찍은 사진을 눈 앞에 들이밀며 화를 벌컥 냈다. 부친은 모친에게 그 사진들을 보여주더니 미쳤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무엇이 대체 못 미더웠길래 그렇게 날 모욕하고 차고 때렸을까. 소리지르던 모친이 쓰러진걸 본뒤에서야 부친은 폭력을 멈췄다. 그리고 내 폰으로 애인을 차단시켰다. 난 지나가는 이 시간들이 무섭다. 그냥 이대로 죽고싶다. 차라리 눈을 감았다뜨면 이 모든 것들이 꿈이길.
2020년 1월 23일 목요일 제목 : 반복되는 하루
15일 이후로 난 더 심한 압박감에 살고있다. 근무지에서 집으로 1분마다 전화하는 부친. 너무 숨막혔다. 집에 오면 바로 전자기기 제출 및 검사. 나의 사생활은 어디있는걸까. 설날이라 부모님의 근무지를 따라가 공부를 한다고했다. 근무지에서 부모님은 날 계속해서 감시해 너무너무 지옥같다. 헤어지라고 했지만, 난 그 요청에 불응했다.. 17일에 부친 생신이었는데, 내가 모든걸 망쳤다고 매일 말하는 부친 때문에 자괴감이 계속 든다. 나 때문에 이렇게 가족 분위기가 나빠진걸까. 괜찮은 척, 아닌 척 노력해도 숨막힘은 끊이지 않는다. 애인이 내 걱정을 할수록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2020년 1월 28일 화요일
제목 : 악몽... 도 이렇지는 않을 것 같다.
거짓말하지않으면 나가지 못하는데, 내 마음을 부모님은 아실까. 학원이 설날 연휴로 쉬는데, 학원에 간다 거짓말하고 애인도 보고 친구도 봤다. 15일 이후로 억압이 심해진 부모님은 거짓말을 알게되었다. 그들은 학원에 전화해 휴일인걸 확인하였고, 또 애인을 만났냐며 집으로 들어오지말라고했다. 난 집 들어가기 싫었다. 이대로 나가면 되지 않을까. 집 나가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밤 10시에 갈 곳은 없었다. 휴대폰 배터리도 없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집으로 들어간 나는 부친의 협박 속에서 외투와 모든 소지품들을 빼앗겼다. 부친은 내 외투를 뺏기 위해 나를 밟고 때렸다. 모친은 그 모습을 그대로 지켜보며 방관했다. 나는 외투를 빼앗긴 채 슬리퍼를 신고 곧장 근처에 사는 이모집으로 향했고, 부모님은 내가 다시 집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죽이겠다고 했다. 결국 나는 이모집에서 내려와 몰래 집카드를 속옷에 숨겼고, 외출금지명령과 당연하다시피 전자기기도 뺏겼다.
2020년 1월 29일 수요일
제목 : 문 따기 성공
날 거실에 내버려두고 부모님은 모든 방을 다 잠그고 출근하셨기 때문에, 난 공부방문을 따기 시작했다. 이쑤시개와 면봉을 부러뜨려서 문고리를 쑤셔 장장 4시간에 걸쳐 문을 열었다.. 부모님이 집 안에 설치한 cctv를 안보는 사이에 난 들어가 공기계를 찾았다. 공기계로 애인에게 상황설명을 하고,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 드림캐처에도 메일을 남겼다. 애인은 잘 살아있어야한다며 내 안부를 살폈다. 난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따 부모님이 오시면 어떻게 대처하지. 수신만 되는 집전화가 울렸다. 모친이 어디갔냐고 날 찾은 것이다. 거실로 나와 다시 누웠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2020년 1월 30일 목요일
제목 : 탈가정, 새로운 시작일까?
부모님이 출근하신 뒤, 화장실 안에서 청소년위기지원센터 띵동, 드림캐처와 친구A에게 연락을 했다. 오늘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한다면 계속 반복될 것이고, 특히 다음주에는 개학이기 때문에 빨리 집을 나가는게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CCTV로 날 지켜보는 부모님의 집전화가 계속되었다. 그 전화를 받으면서 난 몰래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쌌다. 방이 잠겨있어서 옷을 며칠째 갈아입지 못했고 다른 여분의 옷을 챙기기란 어려웠다. 부모님에게 절대 들켜서는 안되는 편지들 모음, 퀴어굿즈 등. 이렇게 죽어도 되겠다 싶을 정도만 챙겼다. 계속 전화가 왔고, 이러다 못 나갈 것 같다는 판단에 집전화의 연결선을 뽑았다. 30시간 가량의 고민 끝에 청소년위기지원센터와 친구 A의 도움으로 집을 나왔다. 집을 나온 순간 느낀 약간의 해방감은 날 눈물짓게 만들었다. 곧장 애인에게 연락했다. 애인은 내가 잘 있다는 안도감을 느꼈지만, 다시 집으로 들어가게 될까봐 불안감도 동시에 느꼈다. 연락을 하고나서 쉼터에 드림캐쳐와 동행해서 입소상담을 받았다. 입소상담에서는 입소를 하려면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하다했다. 난 살고싶어서 나왔는데, 다시 들어가야한다는 두려움에 몸부림쳤다. 부모님은 당연히 동의하지않았고, 그들은 이미 가출신고를 했던 상태였다. 그리고 날 찾으러온다했다. 집에 들어가면 영영 밖도 못 나오고,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부친을 아동학대 혐의로 센터 선생님과 신고했다. 신고한 뒤 절차는 복잡했다. 이 일은… 나중에 또 써야겠다. 일단 결론은 부모님께서는 접근금지명령을 받았다. 오늘은 쉼터에서 자고, 내일은 해외여행갔다오시는 외할머니 집에서 자기로했다. 나 잘한 걸까.
난 그 뒤로 일기장을 넘기지 않았다. 일기장을 더 읽어봐야 좋을 것은 없고, 내 트라우마만 더 쌓일 것 같았다. 그 날 이후로 여전히 경찰차, 구급차 소리와 모습에 예민하다. 이런 내 마음을 가족 중 누가 알아줄까?
그들과 오늘도 여전히 이 집에서 살아가고 있다. 내가 생각한 아웃팅이란, 옷을 누가 벗긴 것 같다. 잘 입고있던 옷을 갑자기 누가 벗겨 부끄럽기도, 기분나쁘고, 또 오묘한 감정이 드는 것과 같다. 주변 청소년을 보면 학교 또는 가정에서 아웃팅을 당할 뻔한, 당하는 사례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하루 빨리 성소수자들이 커밍아웃을 하지않아도 되는 안전한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난 그런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그들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지 알아보고, 도와주고 싶다.
*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 성소수자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띵동 (플러스톡 : 띵동), DDingDong.kr
* 청소년 성소수자 지원팀 드림캐처 (상담, 위기지원, 안전한 공간 및 체험활동 제공) (플러스톡 : @dream_lgbtq)
* 이 글을 읽고 우울감이나 자살사고가 들거나, 위험할 때, 마음이 힘들 때 반드시 연락하세요.
- 경찰(112), 청소년 전화(1388 / 만24세까지 가능), 여성긴급전화(1366)
- 정신건강 위기상담전화(1577-0199), 자살예방상담전화(1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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