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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제없는 스튜디오 Dec 10. 2022

덕질에 적합한 나이가 뭘까

취미를 무시당하는 건 익숙합니다

중학교 1학년, 휴대폰 속 동영상에서 춤을 추는 아이돌에게 빠져버렸다.

계기는 단순했다. 무료하게 페이스북 스크롤을 내리고 있다가 <갓 데뷔한 신인 남돌> 이런 영양가 없는 게시글의 동영상을 별 생각 없이 터치했고, 1분 30초의 짧은 영상에 나는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다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고, 온 몸의 세포가 날뛰는 느낌. 입은 열려 있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손은 벌벌 떨리고 눈을 깜빡일 수조차 없었다. 아마 눈을 깜빡이는 시간 조차 아까워 그 순간을 모조리 주워담고 싶은 느낌. 영어학원에서 봤던 별 감흥 없는 영화에서 나온 표현이 생각났다.

I’ve got butterflies in my stomach.

나비가 내 배 안을 휘젓고 다니듯 뱃속이 너무 간지럽고 긴장됐다. 그 날 이후, 나의 본격적인 아이돌 덕질의 역사가 시작됐다.


용돈을 모아 굿즈를 샀고, 내가 갈만한 지역에서 행사를 하면 시험점수를 얼만큼 올린다는 조건을 부모님께 걸어 행사를 갔었다. 세뱃돈을 모아 팬싸인회를 갔고, 좋아하는 멤버의 생일선물을 위해 난생 처음 2절지에 초상화를 그렸다. 중학교 1학년, 2학년은 소위 ‘돌판’에서는 어린 나이였고, 오프라인 행사라도 가면 다들 내 나이를 듣고서는 다들 한 번씩 눈과 목소리가 커졌었다. 그 이후에 붙는 말들은 이런 식이었다.

“부모님이 허락하셨어요?”

“와 진짜요? 내 동생보다 어리네…”

팬싸인회나 팬미팅이 청소년이 가면 안 되는 곳인 것처럼 들렸다. 유난히 어린 팬이었던 나는, 아이돌의 눈에도 띄었다. 팬싸인회에서 직접 그린 그림을 건네주고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로부터 '중학생이니?'는 얘기를 들었다.

몇 번씩 팬싸인회에 가게 되어 멤버들이 내 얼굴과 이름을 외웠을쯤에는 나도 거기에 익숙해져 “저 이번 기말고사 전교 30등 해서 팬싸 왔어요!” 라고 자랑을 했다. ‘어린 팬’은 특정이 잘 되니까, 스스로 중학생 팬으로 라벨링을 해서라도 나를 기억해 줬음 했다. 사실 내가 ‘중학생 팬’, ‘어린 팬’으로 기억되어서 불리한 점은 없었다. 하지만 타자화 되는 감각은 썩 유쾌하지 않았고, 묘하게 배척당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어린 팬’이라는 꼬리표도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사라졌다.


돌판에서 고등학생은 그렇게 어리지 않았고, 나도 마냥 어리지 않은 사람이 되었지만, 뭐. 입시를 하느라 슬슬 바빠졌고, 오프라인 행사에는 잘 가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살던 도시는 중소도시였고, 행사를 가려면 최소한 1시간 반은 시외버스를 타야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갤러리에 모의고사 틀린 문제, 친구들과 찍은 사진, 과외숙제 인증 사진들이 아이돌 사진을 한참 위로 밀어내어 희미해질 즈음, 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갤러리는 친구들과 간 카페, 동기들이 보내준 웃긴 짤방 같은 걸로 대부분 채워져있었고, 인스타그램 피드를 무료하게 보는 나날이었다. 그러다 정말 어쩌다? 친구의 피드에서 내 옛 아이돌의 근황을 봤고, 이번에도 무력하게 사랑에 빠져버렸다. 몇 년만에 돌아온 가슴 떨림에 내 갤러리는 며칠이 채 안 되어 홀린듯 내 아이돌의 모습으로 채워졌고, 친구들과 식사 사진보다 내 아이돌의 셀카가 압도적으로 많아질 때쯤, 컴백했다.

알바비와 저금을 털어 앨범을 샀고, 팬싸인회에 응모하고, 굿즈를 샀다. 팬싸인회를 기다리며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다가, 중학교 때랑 지금이랑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했다. 정말 그랬다.

달라진 점이라면, 중학생 때보단 돈이 조금 더 있고, 아이돌 보러 가느라 학교를 빠져도 뭐라 하는 선생님이 없었고, 이젠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아이돌을 좋아하냐는 소리를 들었다.


와.


스무살 넘으면 나이 타령 안 들을 줄 알았다. 학생이면 공부나 하라는 소리, 대학 가서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는 소리에 공부만 열심히 했다. 대학에 왔더니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아이돌을 좋아하냐는 소리를 듣고, 걔네한테 쓸 시간을 차라리 스펙에 쌓으라는 소리도 듣고, 도움이 되는 취미를 찾으라고 한다.

... 이렇게 되면 진짜 누가 아이돌 덕질을 할 만한 적임자인지 모르겠다.


중학생 때의 난 아니었고, 고등학생 때의 나도 아니었고, 대학생인 현재의 나도 아니다. 마음이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마냥 매일 흔들리는 나는 정말 많은 취미를 스쳐 지나왔다.

자전거, 도예, 비즈공예, 게임, 필름사진 등등…

그 중에서 제일 이런저런 잔(헛)소리를 많이 들었던건 아이돌 덕질이었던 것 같다. 다들 너무 걱정이 많고, 오지랖이 넓다.

“야, 남돌을 믿냐?” (믿는다고 한 적 없다.)

“어차피 쟤넨 다 나중에 예쁜 여자들이랑 결혼할 건데 왜?” (쟤네랑 결혼할 생각 없다.)

“헐, 쟤 00소속사야? 나중에 깜빵가면 어떡해?” (지금 갔니?)

“와 00그룹 00, 터졌네? 너네 오빠도 조심해야되는거 아냐?” (..... 혹시 그 따위 걱정이 진심?)

자주 조언이라며 늘어놓는 한 친구는 내게

 “나니까 이런 말 해주지. 너랑 같이 걔 좋아하는 언니들? 니가 그렇게 중요할까? 난 니가 내 친구고, 난 널 좋아하니까 이런 조언해주는 거지. 듣기 고깝다고 나쁘게 생각 하지 마.” (...듣기 고까운 건 아는구나.)

... 아무튼 잘 들었다. 나도 안 하는 내 아이돌 걱정을 대리로 해주니 정말 안 고맙고, 조언 대신 조용 해주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 뭐... 내 특기는 적당히 듣고 무시하기니깐, 충고, 조언이라는 잔(헛)소리들을 열심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저런 바보같은 말들에 신경을 쏟을 시간에, 차라리 내 아이돌의 영상을 하나 더 보겠다는 결심으로.


나름 오랜 시간 덕질을 하면서 느낀 점은 주변에서 뭐라고 하던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은 소중한 감정이라는 거다. 누구도 그 감정을 대상이나 나이를 이유로 폄하할 수 없다는 거다. 마음을 다해, 내가 가진 자원을 사용하고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실 대단한 일 아닐까. 이런 계산 없음에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 믿는다. 나에게 조언이 될 책임의 신조를 읊어본다.


아이돌이 내 인생을 책임지지는 않지만, 나는 내 아이돌 인생을 책임져야 하니까...

오늘도 책임감 있게 열심히 덕질을 한다.

(마지막 문구 인용- 트위터 궁수마법사 @goongma)


글쓴이

문제없는 문제아 시루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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