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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제없는 스튜디오 Dec 16. 2022

한 손은 칼, 한 손은 샤프

출구 없는 입시에 익숙합니다 

*본 원고는 자해, 우울에 관한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읽으실 때 유의하여주시기 바랍니다.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샤프를 쥐고 공부했던 그.리.운. 학창시절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이 글을 써야할지 고민이 많았다. 우아한 백조도 물 밑에선 발버둥 치는 다리가 있듯 '다 그렇게 사는 거 아니냐'는 자기 부정이 거듭됐다. 하지만 열심히 살아왔음에 자신만만했던 내가 이렇게까지 아프고 힘든 이유가 나만의 잘못이라고 믿기에는 억울해서 이 글을 쓰자 마음 먹었다. 내 글이 입시로 인한 고통을 겪는 이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거창한 이유가 아니다. '충분히 하고 있어', '모자라지 않아', 도닥일 수 있다면 난 그걸로 충분하다. 나는 그런 위로를 받지 못했지만, 그런 자격은 누구라도 있으니까.

어린 시절, 오른손에 잡게 한 연필 대신 칼을 쥔 아이러니한 상황. 왼손으로 적은 글이 보이지 않는 건 자신의 길을 되돌아볼 여유가 없는 청소년의 현실을 담고자 했다.


네모난 달력에 숫자만 새겨진 똑같은 하루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냥 숨만 쉬는 나날이었다.


 돌아보면 어렸을 때부터였다. 각종 위인전, 성공한 사람들의 10가지 습관, 시간낭비하지 않는 법 등을 통해 늘 쉬지 않고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만이 멋진 삶을 산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고방식은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 부모님은 나의 공부능력 향상을 위해 방학이면 SKY 재학 중인 학생들과 함께 하는 일명 ‘공부습관 캠프’를 보내곤 하셨다. 동경하는 명문대를 다니는 선배들과 공부계획표를 짜며 시간을 알차게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수록, 성공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그렇지 못한 친구들보다 앞서가는 실감이 났다. ‘내가 니들보다 더 우월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한 건 분명 내 잘못이다. 하지만 서점에 가면 빼곡히 쌓인 그놈의 자기계발서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휴식을 게으름으로 치부하는 문화, 그 모든걸 거침 없이 받아들인다면 누가 자신을 우월하다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학교, 학원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방문을 걸어닫고 벽에 기대앉아 한숨을 내쉴 때면 한 번도 빼먹지 않고, 마치 마법의 주문을 외듯 나만의 의식을 치렀다. Imagine Dragons의 Thunder. 가끔 한국어 버전을 들을 때도, 뮤비를 볼 때도, 가사를 읽을 때도 있었다.

 I was lightning before the thunder (나는 천둥 전의 번개)

 난 이 노래를 들으며, 날 천둥을 몰아올 번개라 생각했다. 남들과는 다르다고. 지금 이 고통을 지나면, 엄청난 천둥-노래에선 성공에 비유했다-이 날 기다릴 거라 의심치 않았다. 학교에선 공부를 매우 잘 하는 축에 속했지만, 각 학교의 전교 1,2등과 경시대회 수상자들이 넘치는 학원에서 최하위권에 속했던 나는 속으로 열등감을 많이 느꼈다. 한 번은 친구들 앞에서 과학고등학교 입시 모의 면접을 하고 평가를 받는 날이었다. 내 차례가 되자 머릿속이 하얘졌고, 나는 친구들에게 최저 점수를 받았다. ‘선생님도 아니고 다른 애들이 날 이정도밖에 안 보는구나.’ 나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난 이걸 역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애들이 매겨준 빵점 점수지를 책상 한가운데 떡하니 붙였다. 포기하고 싶고, 지쳐 쉬고싶을 때마다 자극을 받았다. 돌아보면 나한테 너무 가혹했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따위 종이 한두장? 그때의 나에게 이정돈 약과다. 


 평일에는 학교가 끝나면 학원으로 곧장 가 저녁시간 15분을 빼고 11시까지 수업을 받았다. 보충수업은 보통 새벽 두세시까지였고, 방학이면 아침 8시에 학원을 가 다음날 새벽 두세시에 집에 들어왔다. 집에 들어와 씻고, 숙제하고 일어나면 다시 학원, 다시 다음날 귀가. 10대 중반 어린 내가 어떻게 그렇게 살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놀라울 따름이지만,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이렇게 공부하면 피곤한게 당연하고, 쉬고싶고 쉬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이 당연한 걸 그때는 왜 몰랐을까.



빨간 비가 내렸다

 

피곤함을 어떻게든 감추기 위해 카페인 함량이 제일 높다는 스누피 커피우유를 하루에 2L씩 들이마셨고, 집중이 안 될 때면 볼펜으로 허벅지를 찔렀다. 처음에는 살살 약하게, 갈수록 세게 퍽퍽! 그러다 안 되면 스스로 뺨을 찰싹 때리기도 하고, 무릎을 꿇고 필사적이 됐다. 손 들고 얼음물로 샤워하고, 인강을 틀어놓은 채 이어폰을 꽂고 자고, 볼펜으로 손목을 긁고, 그러다 칼에 손을 댔다. 뭐가 문제인지 몰랐다. 나는 나를 사랑하니까. 나는 내가 잘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러는 거니까. 공부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가능하니까. 이게 얼마나 위험하고 심각한 건지 인지하지 못했다. 단지 내 문제만이라고 하기에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자주 오갔다.

 


‘그거 알아?, 응?, 쟤네 오빠 서울대 갔잖아!, 우와..대박, 어떻게 갔대? 공부 진짜 열심히 했겠지?, 그.. 공부하다가 집중 안 될 때마다 볼펜으로 허벅지를 찔러서 오른쪽 허벅지가 완전 시퍼렇대…!’ 

경악하지만 존경과 부러움이 더 큰 눈빛들. 그리고 내 오른쪽 허벅지가 자랑스러워지는 나.


 무엇이 우리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당장 유튜브만 들어가도 나오는 공신, 이지영 쌤, 공부 유튜버들, 독하게 공부하는 법, 자극 글귀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열심히 하지 않은 자가 문제라는 죄책감을 주입하는 온갖 매체들. 공신의 18시간 공부법을 보고 따라했던 학생들도 많을 거다. 성장기에 의무감으로 공부를 18시간 하는게 과연 도움이 될까? 시험 성적 말고 말이다. 열심히 하는 모든 것이 잘못이라는 게 아니다. 그저 나는 힘듦에도 불구하고, 쉬고 싶고, 놀고 싶고, 쉬어야 하고, 휴식을 취해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공부 방법을 성공자들의 대단한 비법인마냥 전수하는 어른들을 비난하는 것이다. 난 힘들 때는 쉬고, 자신을 돌보아주고, 진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달려가는지 때로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 진정한 공부라고 생각한다. 어디를 위해, 무엇을 위해선지도 모르며 그저 공부해두면 좋다는 어른들의 그 말 한마디에 앞, 뒤, 옆도 돌아보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도착한 곳은 절벽이다.


 과학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면서, 미세한 0.001점 차이로도 붙고 떨어질 수 있는게 한국 입시라는 것을 몸소 느꼈다. 내가 붙기 위해서는 꾸준히 열심히가 아니라, ‘남들보다’ 잘 해야함을 깨달았다. 이런 한국 입시의 구조는 공부하는 청소년들을 나태지옥이라는 구렁텅이로 밀어넣는다. 왜 우리는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할 수 있는 한의 최선을 다해도 거기에 만족할 수 없는 저주에 빠진 걸까? 사회는 왜 우리가 그런 행복을 느끼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까.


 하루 네다섯시간을 쪼개 새우잠을 자고, 물 대신 커피를 들이마시고, 쉬는 시간 따위, 친구와 소소한 대화 따위 없이 경쟁에만 몰두하면 우울해지고 무기력해지고 불안해진다. 스스로를 그렇게 몰아붙이는데, 괜찮을 수가 없다. 나는 가정폭력과 입시실패 후 우울감에 시달려 스스로를 도닥이고 마음을 치유할 시간이 정말 필요했다. 하지만 내가 그럴 시간에 남들은 한 문제라도 더 풀 거라는 생각에 그러지 못했다. 불안하고 초조해질수록 나에게 휴식을 주기보단 압박을 주었다. 


 열정을 품은 타이머, 일명 열품타(공부 시간을 측정해주는 앱. 앱 소개문구는 '경쟁자들이 공부중이라면 잠이 오겠습니까?')를 사용하며 전국의 모든 고등학생들과 경쟁을 했다. 수학만 18시간을 넘게 하는 날도 있었다. 전국에서 열품타 순위가 5등안에 들었던 날엔 나 자신이 너무나도 뿌듯해 화면을 캡쳐해뒀고, 힘들고 미쳐버릴 것만 같은 순간에도 공부를 하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지도 모른 채. 학교생활도 학원생활도 순조롭던 어느날, 고1 6월부터 갑자기 본격적으로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공부만 하면 하루종일 심장이 두근거려 밤에 잠을 자질 못했고,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건지 창문만 바라보면 뛰어내리고 싶었다. 어떻게든 집중을 해보려고 손목을 긋고 긋다가, 정말 믿고 의지하던 학원 선생님께 요즘 상태가 이상하다고 말씀드렸다. 용기가 부족해 칼로 자해를 한다고 말하진 못했지만, 평소와 다르게 힘들다는 걸 분명하게 얘기했다. 선생님께선 원래 공부를 하는게 다 그렇다고, 나보다 더 열심히 하는 애들도 많다고 하셨다. 난 너무 궁금해졌다. 정말 그런가? 공부는 원래 이런가. 공부란 원래 이토록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일까. 내가 기억하는 까마득한 어린 시절 공부는 분명 이렇지 않았다. 재밌고 흥미진진하고 궁금증이 가득한 놀이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버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인생의 어느 시점부터 공부는 흥미진진한 탐구가 아닌, 출구 없는 압박이 되었다. 공부를 이렇게 바꾼 건 어른들이 만든 입시다. 공부 감옥에서 스스로를 학대하고 자해하는 걸 당연시하고 심지어 부추기고 칭찬하는 어른들. 


 어느날은 공부를 하다 너무 힘들어서 옥상에 올라갔다. 이러다가는 정말 뛰어내릴 것만 같아 자살예방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네 안녕하세요 자살예방센터입니다”
“네..(울음 참는 소리) 그.. 저.. 공부를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요..”
“아, 학생이신가요?”
“...네”
“학생은 어떤 게 힘들어서 전화했을까?”
“그..(훌쩍) 공부만 하면 너무 불안하고..힘들고..막 죽고싶고 그래서요..”
“학생~ 원래 그 나이때 공부하면 다 그래~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힘들면 산책도 좀 하고 그래봐요~ㅎㅎ”
“..........”
“삐삐삐삐삐-”

 나는 그렇게 자살예방센터 전화를 끊고 말았다. 쉴틈 없이 공부하고, 불안하고, 우울하고, 초조하고 이런 게 당연한가? 어른들은 학생 때는 다 힘든 거라고 말한다. 다들 그러니 네 아픔이 특별한게 아니야. 그러니 너만 참고 넘기면 문제될 건 아무것도 없단다. 하지만 이런 힘듦과 어려움은 당연시한다고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 이 세상 모두가 똑같은 아픔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아픔이 아픔이 아니게 되지 않는 것처럼.



 여기까지 주구장창 암울하기만 한 글을 지금껏 읽어준 독자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인생은 공평하지 않고, 자신을 갉아가면서까지 열심히만 사는 건 소용이 없으니 그냥 다 포기하고 암울하게 살자??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앞으로 피어낼 꽃송이들이 수없이 많은 독자들만큼은 나처럼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인생은 정말 공평하지 않다. 각자의 출발선은 다르고, ‘열심히’의 방법과 기준도 각각 다르다. 그걸 인정하고 다른 이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 첫번째가 되었음 좋겠고, 남의 허언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별을 땄으면 한다. 


 '파도를 막을 순 없지만, 파도를 타는 법을 배울 순 있다'라는 말이 있다. 앞으로도 사회는 끊임없이 극소수의 성공신화를 들먹여 모두를 똑같은 잣대로 판단하고 상처주고 ‘열심히’를 강요할 거다. 우리는 스스로 이런 흐름을 인지하고 그에 맞서면서도 흐름을 타며 나를 지킬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으면 한다. 어디까지가 내 최선이고 한계인지, 내 마음을 돌보는 방법은 그 누구도 정해줄 수 없다. 입시 감옥에선 오로지 나만이 나를 돌볼 수 있다. ‘열심히’ 보다는 ‘건강히’. 어떤 꿈을 향해 입시 감옥에 갇혔든 자신만의 속도에 맞춰 나아가는 모두를 항상 응원하고 싶다.


 사실 이걸 쓰는 지금도 그 당시 들었던 노래를 들으며 쓰고 있다. 난 아직도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것일지도. 달라진 건 나를 압박하지 않는다는 것. 같은 노래, 같은 가사. 하지만 다른 마음가짐. 나는 더이상 나를 지옥에 가두지 않는다. 나는 석방되었다.


나를 불태워 갉아먹으며 달려가는 삶은 성공을 향해 가는 삶이 아닌 절벽으로 모는 삶이 아닐까?




문제없는 스튜디오 스토리에디터

도리 (<병원에서 만난 사이> 기획/제작: 2023 업로드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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