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음악 가치의 변화
음악적이라는 말은 언제 사용되는가? 이 형용사는 사전적 의미로 ‘음악 같은, 듣기 좋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음악이란 어떠한 소리가 리듬, 선율, 화성으로 구성된 예술을 뜻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이 잘 갖추어져 있는 작품을 가지고 '음악적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20세기 이후부터 지금까지 음악은 특별한 소리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새로운 시도의 예로 음악의 리듬, 선율, 화성의 조화를 완전히 붕괴하기도 했는데, 현대음악이라 불리는 이것은 대체로 난해하고 생소하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청각적인 기쁨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음악적이지 못하다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아름답고 조화로운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가 음악적이지 않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현대음악에는 저마다 작곡가가 담고자 한 사상이 존재하고 그것을 새로운 소리로 표현하고자 한다. 나는 이것 또한 음악적인 요소에 부합할 수 있다고 여기며, 음악이 청각적인 아름다움 이상의 어떠한 감정 혹은 사상 즉 의미를 전달하는 데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곡가의 의도나 작품 세계를 이 글에서 ‘내면적 의미’라 정의해 보겠다. 우리는 종종 음악의 이러한 내면적 의미를 잊은 채 귀로만 듣고 그것을 판단하곤 하는데, 작곡가가 음악에 담고자 했던 것에 더욱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대략적으로 17세기 말부터 19세기 초반, 고전주의 시대(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주된 작곡가였다.)에서는 음과 선율, 화성, 리듬 하나하나가 모여 만들어진 음악 '형식'에 집중하여 감상하는 것이 중요한 시기였다. 음악의 내면적 의미보다 청각적 요소가 더 중요했다는 것이다. 당시 유럽에서 대표적인 장르였던 이것은 절대음악이라고 불리는데, 특별한 제목이 있지 않고 작품번호로만 남아있는 곡이 많다. (예를 들어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제15번 C장조 K545.'와 같이.) 다시 말해 음악의 이론적인 부분들, 즉 형식과 구조 이외에 작곡가가 무엇을 생각하며 작곡했는지 그 의도가 전달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는 '표제'를 사용하지 않았던 시대적 특성 때문이라 말할 수 있겠다. 때문에 관객들이 작품을 감상하며 작곡가의 의도를 공감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학자들은 음악을 감상하는 데에 이러한 구조적 특징에 의한 청각적 아름다움만으로 충분하다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낭만주의 시대에는 유럽의 급진적인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탈출구로 여기고자 했다. 이로 인해 구체적인 대상이나 개인적인 감정을 묘사한 음악이 생겨났으며, 동시에 작품에 제목을 붙인 표제음악이 많이 탄생했다. 구조와 형식보다는 내적 의미를 공감하고자 하는 음악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물론 낭만주의 시대에도 절대음악을 추구했던 작곡가들이 있었다. 브람스가 그 대표적 예인데, 그마저도 음악에 가사로 개인적인 시적 표현을 넣는 등 내면적 의미를 다수 첨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 이상 음악의 형식에서 느끼는 청각적 해석만으로는 그 작품을 표현하기에 한계가 발견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인상주의 시기를 지나 20세기 이후 지금까지의 현대음악 또한 대부분이 표제음악이다. 다시 말해, 작곡가가 어떤 주제를 가지고 작품을 썼는지를 곧바로 알 수 있다. 감상자가 생소하고 실험적인 현대음악의 멜로디를 이해하기 힘들어하더라도 작곡가와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20세기 이후의 음악은 실로 더욱 새로웠다. 아주 개인적이고 주관적이었던 19세기 낭만주의 음악 언어로부터 더욱 확장되었는데, 현대음악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20세기의 예술가들이 음악에 중대한 변화를 보이고자 노력한 끝에 탄생되었다. 20세기 이전까지의 음악에서는 선율과 화성, 즉 아름다움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음악 미학적 측면의 개념에 꽤나 변화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더 이상 아름다움이 예술의 본질적 속성이자 최종적 목표가 되지 않았다. 작곡가들은 청각적 아름다움을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20세기 예술가들은 새로운 음악 양식과 기법을 개발하고자 애썼고, 조성이 조금씩 붕괴되었던 그 시기부터 후대까지 가장 영향을 많이 미쳤던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는 온음음계로 이론적 접근으로 조성의 모호함에 관해 탐구하여 내용에 따라 의미가 변하는 프레이즈와 화성을 구성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드뷔시 이후 현대음악은 20세기의 국제적 운동이었던 ‘표현주의’에 의거하여 전통적인 미적 가치를 거부하였고, 이전보다도 더욱 정서에 관한 작품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는 음악의 모호한 조성을 넘어 무조(Atonality) 성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20세기 초에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가였던 쇤베르크는 무조 음악 중에서도 12음 기법의 창시자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는 “음악은 장식이어서는 안 되며 진실되어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예술이 자기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진실성을 가치로 두어 본인의 내면세계를 순수하게 표현한 쇤베르크의 다소 난해한 작품이 초연될 당시에 청중들에게 심한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했다. 평론가들은 그의 음악을 두고 듣기 어려운 음악 이라며 투덜거렸지만, 쇤베르크는 그러한 비판적인 평가를 두고 당시 문화 산업이 조장하는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이 아닌 집중된 듣기를 요구하여 작품을 통해 세태를 비판하였다.
한국에 애정이 있는 작곡가 코드 마이어링은 지난 2019년 3월 1일 독일의 한 현대음악 축제에서 우리나라 3.1절의 100주년을 기념하여 작곡한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총 4악장 90분으로 이루어진 이 음악 <MARSYAS>는 비록 우리에게 소리가 생소하고 듣기에 쉽지 않지만, 작곡가가 한국의 역사를 기리고자 하는 의도가 여실히 담겨 있다. 당시 작품을 감상한 많은 독일 관객들은 그것을 통해 한국의 역사를 알게 되어 감명받았다고 한다. 마이어링이 표현하고자 하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것으로 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음악의 내면적 의미보다 청각적 아름다움이 훨씬 도드라진 작품들이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그것이 비록 누군가에게 ‘음악적이고 훌륭한’ 음악일지라도, 앞으로는 내면적 의미가 더욱 돋보이는 음악이 많이 생겨야 하지 않을까에 대한 의문을 던질 필요성이 있다. 그러한 음악은 청자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깨달아 알고 깊은 생각을 하게 할 것이다.
이렇듯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가지고 독자적인 음악으로 표현해낸 대표적인 현대음악 작곡가가 있다. 20세기 이후의 음악은 개인적이고 진실된 감정을 전달하지 않고서야 음악의 예술성이 이전만큼 표출되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이전까지는 고전주의 시기에 절대음악, 19세기에 표제음악이 성행하며 구조적 의미와 그 내면적 의미의 강조에 대한 대립이 계속되어왔다. 하지만 21세기인 지금 대부분의 음악이 절대음악이 아닌 표제음악에 가깝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보인다. 작곡가의 내면세계를 표출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작곡가의 특별한 의도가 생긴 작품이 더욱 많아지고 있다. 자신만의 내면을 위한 작품이 아니라 청자를 향해 전하는 의미 말이 다. 20세기 이후의 음악은 작곡가 개인의 창작물이 우리가 세계적으로 공유할 수 있도록 폭넓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영국의 음악학자 니콜라스 훅은 “음악은 그저 듣기 좋은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문화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음악을 단순히 청각적인 아름다움 뿐 아니라 그 이상의 내적 의미를 항상 염두에 두고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저 듣기에 아름답기만 한 음악이 아니라, 그것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면적 의미까지 분명히 있을 때에 훨씬 음악적인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코드 마이어링의 곡처럼 말이다. 이것이 예술이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 중 하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