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색을 하지 않은 백발 머리, 구부정한 허리 탓에 작은 몸이 더 작게 느껴지는 노인이 있었다.
건강하지는 않지만 누구의 도움을 받는 것을 원치 않아 홀로 적적하게 지내는 중이었다. 몇 달 전 남편을 여의고 혼자 생활하는 것에 익숙해진 노인이다.
노인은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었다고 믿으며, 또 긍정적인 영향을 주며 살아왔을 것이라 믿었다. 살아온 인생을 아름답다 여기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기대했다. 또한 기독교 신자인 이 노인은 먼저 떠나보낸 부모님과 남편을 천국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천국에서 다 같이 만나면 아직 젊은 동생은 혼자 세상에 남아 조금 외로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평온하게 잠들었다.
가까운 곳에 우물이 보인다. 갈증이 났던지라 물을 좀 마실까 싶어 열심히 달려간다.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참을 달려가서야 겨우 다다른다.
우물가 옆에는 젊은 여자 한 명이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내가 오는 것을 보고 반가워하다가 이내 기다린 사람이 아니라는 듯 실망한 표정을 짓는다.
물을 떠 마시다가 문득 나의 몸을 살핀다. 이곳은 어디인지 두리번거렸으나 알 수 없다. 갈증이 가시고 나니 내가 왜 이곳에 와 있는지 궁금해진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여자에게 물어보니 여기가 천국이고, 천국은 ‘최후’를 맞이했다고 말한다. 그러고 여자는 슬픈 모습으로 등을 돌려 우물 앞에 엎드린다.
아, 대충 알겠다. 난 죽었고 이곳은 사후 세계인데,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모양이다. 어떤 일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천국’은 최후를 맞았다고 하니 지금은 멸망해 없어졌다는 뜻 같다.
천국이 정말 있긴 했었다니, 종교를 믿어본 적은 없지만 정말 존재했었구나. 하지만 어쩐 일로 멸망을 한 것인지, 그렇다면 ‘신’도 죽은 것인지 궁금해진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여자에게 다시 한번 물어보려는데, 저기 반대편에서 조심스레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작은 사람이 보인다. 어린 여자인가 하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백발에 왜소한 할머니다.
“이곳은 천국인가요?”
작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나에게 묻는 할머니를 부축해드리며 여기가 천국은 맞아 보이지만,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 같다고 대답해 드린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노인이 묻는다. 나도 알지 못한다고 다시 대답하려는 찰나, 그녀는 우물을 발견하고 반갑다는 듯 다가가 물을 마시려 한다. 우물에 기대어 있던 여자가 물을 뜨려는 할머니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바라본다. 할머니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젊은 여자는 노인을 그윽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말한다. 천국이 최후를 맞았다고, 그분은 계시지 않는다고 말이다.
노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애원한다. “그럼 내가 했던 선행들은 다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천국에 가기 위한 심판을 위해 그토록 착하게 살려고 애써왔는데... 그럴 리가 없습니다. 우리 ‘그분’을 찾아 천국을 되찾으러 갑시다.”
젊은 여자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지금의 그것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 또한 오랫동안 어디에도 가보고 여기에서 기다려도 봤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말을 마치고 여자는 다시 우물에 기대어 눕는다.
노인과 여자의 대화를 듣고, 내가 생전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이켜 보기 시작한다. 살다 보니 결코 항상 좋은 사람일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심하게 못된 사람이지도 않았다. 적당히 배려하고 적당히 착하게, 그냥 너무 많은 생각하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무난하게 살았다. 이번에도 그 정도의 생각만 한다.
멀리서 빛이 보인다.
빛이 점점 다가와 나를 감싼다. 그것이 움직이는 대로 나는 그저 따라간다.
노인과 여자에게 같이 가자고 이쪽으로 오라고 하고 싶지만, 왜인지 그럴 수가 없다.
눈부시게 빛이 움직이는대로 갈수록 그건 계속 더 크고 광활해진다. 여자와 할머니는 여전히 우물 옆 그 자리에 있다. 나만 어디 좋은 곳으로 가나보다. 환생하는 걸까? 어디로 가는 것인지 궁금하지만, 확실한 건 적어도 이것은 ‘최후’는 아닌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