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떠난 지 이틀이 지났다.
그가 떠난 지 이틀이 지났다. 후련한 마음과 속상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는데 나는 처음 드는 이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다. 그와 언제까지 한 달 간격으로 이런 식으로 만나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기 시작했기도 했고.
그의 말대로 우리는 시간 낭비를 하지 않기로 했고 서로 미래를 약속했다. 그리고 미래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나는 원룸에 살아도 서로 재정적 안정감을 쌓아가고 같이 껴안고 잠을 자고 요리를 하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볼 수 있는 사람과 함께였으면 좋겠다 했고 그는 시골에도 살 수 있고 도시에도 살 수도 있으며 아님 여러 도시에 거주지를 만들고 왔다 갔다 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자신이 여행을 통해서 많은 걸 배웠다면서. 그리고 만드는 걸 좋아하기에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한 집에서 살고 싶다고 하는데 나는 원룸만으로도 충분했기에 (아기를 낳을게 아니기에) 그의 바람이 조금 벅차다고 생각했다.
그가 여기다가 아기까지 원한다면 고양이도 원한다면 나는 그와 함께 하지 못할 거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 곳에 터를 잡고 발을 딛고 정확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면서도 놓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주는 재정적 안정감 때문이었는데 어른들의 말에도 남편이 무슨 짓을 해도 생활비만 제대로 준다면 같이 사는 부부들이 많다고 하는 것이다. 그만큼 이 세상에서 돈을 벌기는 어렵고 일을 안 해도 될 정도로 돈을 번 내 남자친구를 이 세상에 연애 시장에 다시 반납하기엔 아쉽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그는 내가 아니어도 다음 연애 상대와 결혼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결혼이 하고 싶은 걸까? 꼭 이 사람이어야만 하는 간절함일까 아니면 결혼을 해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인 걸까? 내 인생을 걸 만한 남자인가?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 중에는 제일 똑똑하다는 것만은 확실했으나 내 인생을 걸 만한지는 나는 의문이 들었다. 이 사람을 뭘 믿고 미국을 따라가지? 이런 마음?
근데 내 걱정과는 다르게 그는 장을 보면 뭐라 할거 같다고 했었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내가 생각했던 그의 모습과는 그는 다를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의 말대로 나는 최악을 가정하고 상상하지만 그는 반대다.
시크릿이 있다면 그는 그가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버는 상상을 했기 때문에 그의 생각이 미래를 이끈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엔지니어 남자를 만나고 싶어 했던 것처럼. 시작은 작은 대화에서였다.
나는 글을 쓰고 있었고 프런트에 아랍계 런던인이 와서 말을 걸었고 뭐 하고 있냐고 해서 나는 글을 쓰고 있다고 사실 사진을 취미로 하고 책도 만들었다고 했고 나보고 부자 같다고 해서 아빠가 건축사이고 도움을 많이 받아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거라 했다. (당시까진 아빠가 카드값을 해결해 주고 있었다.)
그는 내가 계속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싶다면 엔지니어나 아빠 같은 건축사를 만나라고 했다. 그가 마법을 걸고 가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짜로 몇 달 뒤에 엔지니어인 마이클을 만났고 나는 그게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세상에 자본주의 세상 속에 살고 있었고 그걸 벗어날 수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모두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를 보니 더 많은 걸 바라도 되겠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간혹 로또 당첨이라던가. 로또가 된다면 대학에 다시 가고 건축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니면 취미로라도. 아니면 아빠 빚을 갚아주거나. 내 빚도 갚고.
그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었고 나는 그게 싫었다. 그에게 영향을 받아 절약을 하고 돈을 아끼고 미국에 갈 꿈에 들뜬 나 자신이 싫었다. 나는 정말 금문교가 보고 싶은 걸까? 나는 샌프란시스코 책을 사러 교보문고에 갈 것이다 내일이면. 아니면 8월 달에.
올리브영에서 과소비를 했고 하지만 모두 필요한 것들이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200만 원으로 생활을 해야 했고 이 생활이 빠듯하다고 느꼈다.
그가 떠나고 나니 남겨두었던 모든 일들이 덮쳐왔고 방정리부터 시작해서 다시 시작된 생리, 여름의 중순, 널브러진 내 속옷들과 옷들 캐리어 등등을 주어 담아 다시 캐리어에 담아 그에게로 향하고 싶었다.
지금 당장 와달라고 내가 널 평생 케어할 테니 오기만 해 달라 하면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그에게로 달려갈 용기가 나에게 있을까? 나는 일을 그만두면 안 된다고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고 시집을 가든 말든 계속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본부장 이사님처럼 30년 이상 근속하고 싶었고 나는 그게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마이클이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조금 슬펐다. 그의 튀어나온 옆구리 살과 팬 얼굴 주름들이 그의 나이를 표현하고 있었고 나는 그걸 알면서도 그가 주는 안정감이 좋았기 때문에 나보다 나이가 많은 그를 만나고 있었다.
오늘 불현듯이 내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느껴져서 나를 그릇에 담긴 물로 그를 스펀지로 비유해서 생각해 보았다. 나는 꼼짝없이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스펀지에 흡수당해서.
그는 점점 나를 예측하고 관찰하면서 흥미를 잃어버리고 있는 느낌이었는데 그냥 나는 그럴 바에는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나를 버려줘. 자유롭게 해 줘.라는 마음이랄까. 그도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라면 나는 언제든지 그를 놔줄 의향이 있었고 내가 아무리 생지랄을 떨어도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않는 그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오늘 계장님은 그렇게 돈이 많으면 세상에 더 예쁜 여자들을 만날 텐데 왜 너를 만나냐며 내가 을이라면서 다 을이면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을이 되기 싫은데. 나도 그가 왜 나를 만나는지 의문이었다.
내가 그를 돈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는 것처럼 그를 진짜 돈만 보고 만나는 여자애를 만나서 고생을 해봤으면 좋겠단 생각도 어느 정도 들었었다. 맨날 비싼 레스토랑에 데려가거나 이것저것 사달라 하거나. 나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나도 그랬어야 했을까?
30일가량이 남았다. 그가 다시 오기 전까지. 그동안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일을 하고 미술관에 가고 친구들을 만날 것이다. 잃어버린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오늘은 그와 연락 때문에 크게 싸웠다. [너는 친구들이랑 연락할 시간은 있으면서 나한테 연락할 시간은 없어? 내가 너를 9시간 넘게 무시하길 바라? 나한테 문자 하기 싫으면 평생 하지 마. 친구들이랑 해. 네가 피곤하고 바쁜 건 알겠는데 연락은 기본 아니야?]라고 싸움을 시작했고
[네가 일어난 줄 몰랐어. 그냥 나한테 인사하면 되는데. 응 오늘 좀 바빴어] 당연하게도 내가 한 말들을 살포시 회피하고 할 말만 하기 시작해서 나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고 [너는 내가 갑자기 사라져도 신경 안 쓸 거야]
[드라마틱하게 굴지 마]로 시작된 싸움은 계속되어 [너 인생에 내가 1순위가 되어야겠단 게 아니야. 적어도 친구들보다는 소중히 여겨야지. 그리고 아무리 지루하고 말하고 싶지 않더라도 잘 자 굿모닝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말했고
[너는? 너는 내가 친구들한테 내 하루를 다 말하고 굿모닝 문자를 보낼 거 같아? 난 그러지 않아.] 이따위로 말했고 [내 요점은 나는 너한테 공간과 시간을 많이 주는 편이야 그게 당연하다고 느껴진다면 나는 너를 더 이상 케어하고 싶지 않아.] [난 이해가 가지 않아. 굿 나이트]라고 그는 말하고 자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