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1998년 공고 실습생으로 부천공단에서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고 1989년엔 인천 주안공단의 오디오 공장을 다니며 모종의 스탈린주의 혁명가를 만나 사회혁명을 꿈꾸고 있었다. 1990년 입대해 93년 제대하고 보니 입대 전 혁명을 이야기하던 학생 출신 선배들 대부분이 운동을 포기하고 없었다. 1991년 소련 붕괴가 학생 출신들에겐 되돌릴 수 없는 충격이었던 것이다. 이때 나에게 사회혁명을 포기하지 않게 한 이론적 길을 밝혀준 책은 토니 클리프의 저작 소련 국가자본주론이다. 오늘 내가 소개할 책 세컨드 핸드 타임은 옛 소련 사회에서 살던 민중들의 생동감 있는 진술로 그 사회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은 1부와 2부로 구성돼 있다.
1부에선 1991년 소련 붕괴와 2차 세계 대전 전부터 1991년의 과정을 역으로 다룬다. 그리고 2부에선 1991년 이후부터 2000년대 초 푸틴의 등장하기까지 사회 변화에 따른 민중들의 삶을 다룬다. 그들의 목소리와 언어로 말이다. 수용소의 참상을 다룬 부분을 볼 때면 참아 책장을 넘기는 그것조차 두렵고 힘들었다. ‘세 살까지 엄마와 함께 수용소에서 살았어요.’ (3살이 되면 분리 수용한다) ‘엄마는…. 겨울에 죽은 아이들은 통에 담아두었는데, 그렇게 봄까지 그 통에 두었대요. 쥐들이 갉아먹곤 했다더군요. 봄이 되어서야 장례를 치를 수 있었대요. 그나마 남을 걸 모아서요’
스탈린의 강제 수용소 모습
스탈린은 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유대인을 차별했고 소련 군대에서 배제했다. 그리고 독일 점령지 빨치산 지휘관들에게 스탈린은 ‘유대인들을 신뢰하지 말 것, 부대원으로 받지 말 것, 죽일 것,’이라고 비밀 지령을 내렸다. 이를 나중에 알게 된 빨치산 출신의 유대인 노인은 ‘난 조국을 지키고 싶었어요.’ (하지만) ‘조국은 우리를 배신자 취급했어요. 우린 이 사실조차도 페레스트로이카 덕분에 알게 됐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차별뿐 아니라 여성에 대한 차별도 끔찍한 형태로 자리 잡았다. 비밀경찰에 밀고당할 위험은 누구도 자유롭지 않았다. 실제로 가족과 친인척 중 비밀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일이 없는 가구가 없을 정도다. 비밀경찰 역시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무고한 줄 알면서도 지속해서 조작하고 또 조작했다. 이런 사회가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뿐이다.
한편으로 소련 민중들은 2차 세계 대전에서 1천만 명이 희생하며 히틀러와 나치에 승전한 것에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시작된 냉전에서 서방과의 대립과 경쟁이 결합해 스탈린의 피비린내 나는 숙청과 수용소, 공포정치를 견디게 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소련 민중들의 스탈린에 대한 감정은 ‘히틀러에 승리한 영웅, 서방과 대결에서 밀리지 않는 소련 지도자’ ‘수용소와 비밀경찰, 강제 이주와 학살자’란 모순적 이미지로 존재한다. 공포정치와 함께 경제는 성장했고 생활 조건이 일부 개선되며 노동자들과 민중의 불만을 달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련 경제는 1970년대 말부터 정체하기 시작해 1991년 소련 붕괴를 불렀다.
스탈린 그라드 전투의 희생자들
1991년 거리로 나선 소련 민중들이 원했던 사회는 시장 자본주의가 아니었다. 그들은 권위주의적인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가’ 아닌 민주주의가 보장된 사회주의 사회를 원했다. 그래서 군부가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를 좌절시키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거리로 뛰쳐나와 혁명을 외치며 맨몸으로 탱크에 맞섰다. 한 노동자는 월급을 통제로 24종의 신문을 사들여 읽었을 정도로 사회혁명에 관심이 높았다는 사례는 참으로 인상 깊다. 군부의 쿠데타를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노동자들이 새로운 사회에 대한 꿈과 이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운동에 참여한 젊은 세대들은 민주적 사회주의 혁명을 꿈꿨지만, 고르바초프도, 옐친도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혁명에 대한 전망도 혁명을 이끌 능력도 없었다. 그저 소련 사회의 모순이 폭발하는 것을 누그러뜨리려는 시장 개혁주의자들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민중들의 혁명에 대한 열정과 희망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 열광하다가 실망하고 옐친에게 기대를 걸었다가 좌절하고 말았다. 작가는 말하지 않지만 진정한 사회혁명을 이끌 혁명 정당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 민중들의 혁명에 대한 희망과 열정은 좌절과 냉소로 바뀐 것이다.
소련 민중들의 혁명적 열정과 희망을 시장 자본주의로 왜곡시킨 옐친과 기회주의자들
‘일국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소련 제국의 붕괴와 ‘시장 자본주의’로 이동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무질서와 혼동의 연속이었다. 이때 돈을 벌어들인 자들은 대부분 권력 기관에 있었거나 그 들의 친인척들이다. 옛 소련에서 권력을 가지고 떵떵거리던 자들이 시장 자본주의에서도 지배계급으로 성장해 간 것이다. 반면 노동자 민중들은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를 열망해 운동에 동참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소련 연방이 붕괴하면서 곳곳에서 우익 민족주의 세력이 성장해 내전을 벌어졌고 어제까지 이웃사촌이었던 이들이 오늘은 서로 살육하는 인종청소가 벌어졌다. 이런 살육전은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재연되고 있으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미국과 나토 VS 러시아의 제국주의 각충장이 된 우크라이나 전쟁
전쟁과 인종청소, 체첸 독립전쟁과 테러 등 혼란과 무질서는 옛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향수를 불러오기 충분했고 기회를 보던 KGB 간부 푸틴 같은 독재자가 권력을 잡아 장기 집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4.19 혁명 이후 민중들의 열망을 저버린 야당, 혁명을 더 밀고 나갈 지도력이 없는 상황과 혼란한 틈을 이용해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한 것처럼 말이다.
이런 과정 모두 소련 민중들의 생생한 인터뷰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 이 책의 커다란 장점이다. 새컨드 핸드 타임은 옛 소련 사회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싶은 이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그리고 소련 사회의 근본적 모순을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기초해 분석한 토니 클리프의 소련 국가자본주의도 함께 읽어 보면 더욱 좋을 것이다.
역사는 담담하고 무심하게 기록된다. 그 주체들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역사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역사에 개입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선 혁명적인 열정과 희망이 유실되지 않게 개입하고 지도력을 획득하려고 애쓰는 정당이 필요하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경제위기 장기 불황, 코로나19 팬데믹과 기후위기가 서로 상승작용하고 있는 오늘날 더 절박하게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