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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노 Jan 21. 2022

다를 바 없는 본능



 언제 죽을지 모른다. 늘 그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한다.

 인간은 누구나 영원을 살 것처럼 생각하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선 이상하리만큼 관대하며 그날은 왠지 오지 않을 것처럼 여긴다. 내일 당장, 아니 어쩌면 이 글을 읽고 난 후에 바로라도 '그날' 일 수 있는 데 말이다.



 내가 시한부를 선고받은 것은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날들의 하루였다. 한 달 동안 복통이 있었고, 어지럼증이 동반되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인간의 몸은 허약해서 손끝에 작은 생채기가 나도 피가 나고, 심하면 파상풍까지 걸리는 법이다. 그러니 한 달의 복통과 어지럼증이야 살다 보면 있는 일이 아니겠나 생각했고 그것은 결국 큰일이 되고 말았다.



 이미 손을 떠난 일이었다.

 곁에선 친구들과 가족이 나를 위해 열심히 기도를 해주었다. 정말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들이 눈물을 펑펑 흘리며 열성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들이 울기 위해 기도를 드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런 못된 심보라 내가 죽을병에 걸렸구나 하는 이상한 납득이 되기도 했다. 또 그들이 너무 격정적으로 울었기에 '저렇게까지?' 싶으면서 한편으로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의 어두운 삶을 걱정하기도 했다. 그런 순간이면 내가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잠시 잊혔으므로 그것만이 기도의 순기능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매일을 옆에서 울부짖고 절망적인 것에 대해 기도하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내가 죽는다는 게 이것 때문인가 싶을 지경이었다. 나는 그래도  고마운 그들에게 요양을 위해 잠시 혼자 있겠노라고 말을 전하고, 누가 같이 따라나선다고 말하기 전에 훌쩍 이곳으로 도망치듯 떠나왔다.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남은 날까지 하나씩 자신의 주변을 정리한다고 하지만, 막상 내가 그 상황이 되고 보니 그런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어찌 되었건 나 이외에도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될 텐데 남들보다 좀 더 이르게 그 순간을 맞는 것뿐이라고 자위했다. 오히려 남들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고 산다지만 나는 의사가 '곧 죽을  것' 이란 사실을 알려주었으니 그나마 조금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니 처량하게, 남은 이들을 위해 물건을 남기거나 편지를 남기는 일 따위 하지 말고 원래 평소대로 살기로 다짐했다.



 내가 마지막 살 곳으로 정한 이곳은 작은 시골 마을이다. 몇몇은 농사를 짓기도 한다. 근처에 작은 병원이 있지만 아파서 병원을 가는 사람은 없다. 이 마을에서 아프다는 건 곧 죽음과 연결되기 때문에 치료라는 것이 없다. 그러고 보면 저 병원의 의사는 주 업무가 사망선고 일지 모른다.

 암묵적인 호스피스 마을이다. 사실 대놓고 '죽음을 기다리는 마을'임에도 아무도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죽음이 바로 눈앞에 있어도 또 그것을 피할 수 있을 데까지 피하려는 심리다.



 죽음을 기다리는 마을에 젊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 처음 내려왔을 때 누구 하나 '아이고, 젊은 사람이 어쩌다가..'란 식의 말을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일단 이 마을이 마음에 들었다. 대부분이 노인인 그들은 그저 '안녕하세요'하며 너무 가볍거나 무겁지 않은 표정으로 인사를 해주었다. 하긴 이 마을의 인사로 '잘 왔어요'따위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나는 될 수 있으면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가벼운 강도의 스트레칭 겸 운동을 한 다음 마을 한 바퀴 산책을 하고 돌아와 점심을 먹고 저녁시간까지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으며 글을 썼다. 전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 죽음이라는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때 내가 제일 먼저 안타까웠던 것은 아직 보지 못한 수많은 영화들과 음악, 책 들이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세 가지 중 하나를 무조건 했다.  영화나 책 같은 경우는 완결이 난 것 만 찾았다. 결말도 모르고 죽는다면 얼마나 궁금하겠는가. 나는 죽을 때 마지막으로   '아, 그래서 루피는 해적왕이 되는 건가...'란 생각으로 마무리하고 싶지 않다.



 가끔 마을 주민 중 한 둘이 자신이 키운 채소 같은 것을 문 앞에 두고 가기도 했다. 나는 아직 흙이 묻은 채소를 흐르는 물에 깨끗하게 씻고 톡톡톡 가지런하게 썰어서 아침 식사 대신 오도독, 씹어 먹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이 재배한 것이라 뭔가 시들시들할 것만 같은데 채소는 너무도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아이러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새로운 것을 탄생시키는 것이.

 한 달이 지났을 무렵, 마을에 새로운 사람이 내려왔다. 패션잡지에서나 보던 그런 모던한 스타일의 신사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기에 나가보니 그 사람이 서 있었다. [새로 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정중한 인사였다.

나 또한 곧 죽음을 앞둔 사람이기에 정중했나, 했지만 아니었다. 그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매너 있게 행동하고 정중했다. 나는 그 사람에게서 죽음의 그늘 따윈 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정부나 어디 복지사에서 나온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는 죽음을 기다리는 마을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 사람에겐 락스 냄새가 났다. 화장실 청소할 때 나는 그런 고약한 락스 냄새가 아니고, 깨끗한 파란 물이 들어찬 수영장에서 나는 그런 락스 냄새였다. 그래서 그런가 그 옆에 있노라면 나는 한없이 깊은 수영장 밑바닥에 있는 기분이었다. 곧 귀는 멍멍해지고 숨이 들어찬다.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곧 그 사람 주변엔 사람들이 몰렸다. 모두가 저마다 죽음의 기운을 풀풀 내뿜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그에게서만 생명이 뻗쳐 나왔다. 나와 같이 정화되길 원하는 사람들은 그를 쫓아다녔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이 들었다. 모두가 그 사람의 뿜어져 나오는 생명력을 조금이라도 얻기 위해 쫓아다닌 다는 것에, 그리고 나도 그 무리 중 하나였다는 것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처음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점잖고 죽음을 겸허히 준비하는 자들 뿐이었는데.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애써 눌러놓은 마음이, 그 사람의 등장과 함께 다시 터진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날부터 나는 의식적으로 그 사람을 피해 다녔다. 죽을 사람이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것을 감당하기에 얼마나 늦은 일인지, 나는 다시 힘들어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 그를 쫓아다녔고, 심지어 조금씩 패인 볼에 생기가 돌기도 했다. 그건 분명 '기분 탓'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말 꺼져가는 회색빛에 주황색 열기가 싹트고 있었다.



 나는 마을 산책을 그만두었다. 생명력이 퍼져가는 마을을 둘러볼 용기가 없었다. 나는 확실하고, 착실하게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몇 주를 집 안에 틀어박혀 타란티노의 영화를 시대별로 챙겨보고 하워드 쇼어의 음악을 모조리 들었다.








 그날은 이른 오전부터 가랑비가 내렸다. 나는 온라인 중고 마켓에서 M.Butterfly의 OST 카세트테이프를 어렵게 구한 참이었다. 사이드 1면의 4번 곡인 Dragonfly를 계속 반복해서 들었다. 오래된 노래라 그런가 음악 사이트에선 검색되지 않았는데 며칠을 듣고 싶은 열망에 들끓다가 카세트테이프라도 구하게 된 것이다. 원 없이 듣지 못하고 이대로 죽어버리면 너무 후회할 것 같았다.

 


 진작 내 건강과 삶에 대한 집착을 이렇게 썼더라면 아마 지금 이지경까지 오진 않았을 텐데. 죽음이 닥치고 나서야 발휘되는 집착과 열성이라니. 마감이 닥쳐야 스퍼트를 올리는 게 웃기게도 너무 나다워서 나는 한참 큰소리로 웃어버렸다.



 저녁이 돼서야 나는 모처럼 밖에 나가고 싶어졌다.  오전에 한바탕 웃은 것이 도움이 된 건지도 모른다. 모든 게 희극적으로 풀이되었다. 심각한 건 사실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 까짓것. 베르나르의 어떤 책 구절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놈도 죽었는데 나라고 못할 건 없지'같은 심정이랄까.

 나는 우산을 받쳐 들고 집을 나섰다. 저녁 일곱 시인데 해가 많이 저물었다. 다행히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집에서 저녁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자박자박, 자갈길을 걷는 건 언제나 기분이 좋다. 신발 밑창으로 오돌오돌 느껴지는 자갈들도 좋다. 비 내음을 가득 안은 나무 냄새도 좋다. 이렇게 좋은 게 천지다. 죽을 때가 되니 다 좋다. 모든 게 아쉽다. 아, 진짜 어리석은 인간.



 내가 모든 환경에 취해있을 때 불현듯 어둠 속에서 그가 불쑥 나타났다. 하지만 난 한동안 그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가 누군지 알았지만 알아보지 못했다는 게 정확하다. 늘 깔끔하던 구두는 진흙이 묻어 있고, 하얀 칼라의 셔츠엔 때가 껴있었다. 바지는 뭔지 모를 이물질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리고 모든 생기가 빠져나간 그 얼굴! 원래 지녀할 모습을 잃어버린 탓인지 분명 그는 그 자신이었지만 전혀 사람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직감했다. 그는 모든 것을 빼앗겼다.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래도 얼마 살지 못할 사람들'에게서 도망쳐 온 것이다. 겨우 자신의 죽음을 유지할 정도의 생명만을 지닌 채로.

비가 후드득 떨어지는 한 밤에 나는 그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어쩌면 나는 '괜찮을지도' 모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를 쫓아다니는 것을 그만두었으니까, 그래서 찾아온 것이 아닐까.



 나는 아무 말이 없는 그 사람을 소파에 앉히고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었다. 하필이면 몇 주를 집안에서 뒹굴뒹굴하던 터라 식재료가 똑떨어져 버렸다. 나는 밑 칸에 남아있던 채소를 꺼내 껍질을 깨끗하게 손질하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나무 접시에 담았다. 그리고 테이프의 재생 버튼을 누르고 소리를 키웠다. 음질이 좋지 않아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같이 났지만 오히려 자갈길을 걷는 것 같아 나쁘지 않았다.  

 그의 앞에 접시를 내려 두고 나는 간이 의자에 앉았다. 한참을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그가 천천히 손을 뻗어 한 조각 집어 들었다.



[오도독,]

부실한 그의 치아가 견뎌주길 바라면서 나는 그가 한 접시를 모두 비우는 것을 바라보았다. 채소의 생명력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그는 소파 위에 몸을 뉘었고 나는 그가 눈을 감는 것을 보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방 안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난생처음 맡아보는 냄새였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소파로 나가보니 그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나는 그가 덮고 있던 담요로 얼굴을 덮어주었다. 이 마을에서 죽음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이곳은 죽음을 기다리는 마을이기에.

 나는 평소대로 살기로 다짐했듯이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고 거울에 비친 내 두 뺨엔 주황색 열기가 돌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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