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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노 Jan 20. 2022

가슴을 뚫고 들어오는 손

 



남자는 침대에서 눈을 떴다. 아침이겠거니, 했다. 밤에 잠들고 밤에 눈을 뜨는 건 아주 오래전 일이다. 요즘은 밤에 잠들고 아침에 깬다, 보통은 밤에 잠들고 새벽에 눈을 떴다가 잠들고 아침에 깨지만, 그렇게 빡빡하게 따지고 들면 피곤하다. 특히 요새는 그렇게 따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될 수 있으면 둥글게 둥글게.

 천장에 흑갈색 얼룩이 거슬린다.

 남자는 다음에 뭘 할지 계획하고 움직이는 편은 아니지만 이쯤 되면 잡생각을 그만하고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9월이었고, 체크아웃 시간은 12시였다. 지금은 7시였지만 체크아웃 시간까지 비비적거리고 싶지 않았다. 9월이니까 바깥바람을 쐬고 싶다.

 온수와 냉수에 자비 없는 호텔 욕실에서 남자는 앗 차거, 앗 뜨거워를 번갈아 6번쯤 말하고서 수건을 둘둘 말고 나왔다.

 속옷을 챙겨 입고 널브러진 짐부터 정리했다. 어제 입었던 옷을 대충 말아서 침대 위에 던져둔다. 짐 자체가 많지 않아서 정 리랄 것이 없다.

밤새 자면서 흘린 땀을 씻어내니 조금 더 개운한 아침 느낌이다.

 휴대폰으로 노래를 틀었다.



 여자는 TV가 달려있는 벽에 딱 붙은 긴 테이블 바에 앉아있다. 물론 의자는 구비되어 있었지만 여자는 앉으라고 만들어 놓은 곳이 아닌 데에 장난꾸러기처럼 앉고 싶었다. 그리고 이쪽이 남자를 바라보기에 더 적합했다.

 남자가 눈을 뜨는 것을 지켜본다. 남자가 무언가 인지하는 것처럼 눈만 뜬 채 멍하니 천장을 본다. 여자는 남자를 보고 아직 깨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남자는 밤새 아주 멀고 먼 무의식을 탐험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으니 당연히 현실 세계로 복귀하는 것에 시간이 걸릴 터였다.

 여자는 이해했다. 여자도 종종 현실로 돌아와야 할 때면 귀에서 삐하는 소리가 나고 압력이 차며, 동공은 풀리고 생각은 뿌옇다가 의식이 어느 한 곳으로 집중된다. 그 집중은 아무 의미도 없는, 지나치는 길거리 간판 같은 느낌이라 생각하면 된다. 의식은 그저 현실로 돌아오려고 주변에 눈에 띄는 무언가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것뿐이다. 가령 벽돌이 이뻐 보인다, 하는 것처럼.




 

여자는 남자를 따라 천장을 올려본다. 남자의 집중은 천장 얼룩에 있었다. 어제 하루 꼬박 묵으면서 신경도 쓰지 않던 얼룩이었다. 남자는 어제보다 오늘 아침에 얼룩이 조금 더 커졌다는 건 알지도 못할 거였다.

 이윽고 남자가 세계로 돌아왔다.

 여자는 안녕? 하고 인사했다. 남자는 머쓱한 표정으로 일어나 욕실로 쓱 들어갔다. 여자는 그런 표정을 짓는 남자가 귀여웠다. 남자가 나오면 밤새 무슨 꿈을 꾸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남자의 앗 차거, 하는 소리가 들린다. 여자는 자신의 발을 엑스 자로 엇갈린 채 둥둥 흔들었다.

앗 뜨거워, 남자가 외친다. 여자는 욕실에서 수도꼭지를 돌리며 뜨겁고 차가운 물을 맞는 남자의 여린 피부를 떠올린다.

앗 차거!

안쓰러운 마음이 웃음으로 터져버리고 만다. 여자는 하하, 웃었지만 다행히 욕실에 남자는 듣지 못했다. 그 이후에도 남자는 앗 뜨거워 와 앗 차 거를 세 번 더 외치고서야 욕실 밖으로 나왔다.



 여자는 깜짝 놀라 급히 고개를 돌린다. 남자의 벗은 몸을 본 적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익숙하게 볼 수 있는 것도 아닌 법이다. 여자는 늘 부끄러워했다. 그건 자신이 타인의 앞에서, 타인이 자신의 앞에서 단순히 알몸이 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몫의 전부는 아니다.

 예전 학교 수업 중에 누드 크로키를 할 때 여자는 자기 또래의 남자 모델을 그린 적이 있다. 잔근육이 붙어 있는 슬림한 체형의 남자였다. 모델은 편한 자세를 취해 달라는 요청에 왼쪽 옆구리가 드러나도록 팔을 올렸다. 여자는 구도를 잡고 남자의  가늘게 떨리는 손끝, 살짝 경직된 팔뚝과 매끄럽게 허리로 이어지는 곡선을 보면서 남자의 신체도 굴곡이 많은 여자만큼이나 탄탄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엉덩이는 만지면 뽀득거릴 것 같은 허벅지를 잘 당기고 있었다. 여자는 시선으로 남자의 몸을 아주 꼼꼼하게 덧 칠해갔다. 시선이 물리였다면 남자는 이제 그만해달라고 애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남자의 알몸을 탐닉하면서도 여자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여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적당한 예가 아니야' 그리고 다시 생각을 더듬었다.

 겨울 종강 파티가 있던 날, 한 학번 위에 선배와 모텔에 갔었을 때도 여자는 부끄럽지 않았다. 술이 취해서 정신이 없던 것도 아니다. 그저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어도 그런 감정은 들지 않았다. 감정보다 행위가 상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짝짓기 하는 동물들이 부끄러워하지 않듯이. 부끄럽다는 건 여자에게 그런 의미였다. 여자는 남자 앞에서라면 100번, 1000번 부끄러워할 작정이었다.

 다행히 여자가 고개를 돌리고 부끄러워하는 사이 남자는 속옷을 입고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제 입은 옷을 둘둘 말더니 침대 위로 툭 던져 놓고 잠시 무엇을 더 정리해야 하는지 방을 한 바퀴 둘러본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정리하기 전에 휴대폰으로 노래를 튼다.







 여자는 남자가 틀어놓은 노래의 멜로디를 같이 흥얼거리며 처음 자세 그대로 남자를 지켜본다.

 침대 위로 던져둔 옷을 다시 가져와서 정갈하게 개기 시작한다. 옷을 재봉선 따라 평평하게 펼친 후 소매 부분을 안쪽으로 반씩 접어 넣는다. 그리고 아래 단을 3/1로 두 번 접고 앞으로 돌린다. 티셔츠의 로고가 보이도록 잘 개졌다. 여자는 깔끔하게 개진 옷을 보고 놀라워한다. 저렇게 쉬운 방법으로 웃을 깔끔하게 갤 줄 알았다면 옷걸이는 그만 사도 됐을 텐데. 여자는 자신의 옷장에 넘쳐나는 옷걸이들을 떠올린다.

 남자는 자신이 마신 500ml 생수 페트병의 라벨지를 뜯어내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페트병은 따로 모아둔다.



 여자는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남자에게서 옅은 샴푸 냄새를 맡는다. 봄에 피려는 꽃 향 같기도 하고, 여름 낮 깊은 산속의 흙 내음 같기도 했다.

 여자는 천장의 얼룩을 본다. 어젯밤 새끼손톱만 하던 얼룩은 남자의 갈색 눈동자만큼 커져있다.

 남자는 자신이 누웠던 침대의 이불을 정리한다. 여자는 남자의 마음이 좋았다. 그저 자신이 깔끔한 게 좋아 머물렀던 자리를 정리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여자는 남자가 이 방을 나간 후에 방을 정리하러 들어오는 사람이 청소하기 편하게 정리된 방을 보면 분명 기분이 좋으리라 생각했다. 남자가 그것까지 고려한 것이 아니더라도, 여자는 남자가 행하는 것이 긍정적인 피드백으로 돌아오리란 것이 좋았다.

 


 남자는 방 정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놓친 것이 없는지 한 번 더 방을 둘러보고 TV 앞 테이블에 올려 둔 손목시계를 채우고서 방을 나선다.

 로비를 나서는데 두 대의 경찰차가 호텔 앞에 멈추어 선다.

그러고 보니 남자는 간 밤에 아주 희한한 꿈을 꿨던 게 기억이 났다. 하지만 내용까진 기억나지 않았다.

 남자는 긴박해 보이는 경찰관들을 흥미롭게 바라보다가 그들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을 보고 밖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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