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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노 Jan 16. 2022

누군가에겐 리셋 버튼



꿈을 꾸다 잠에서 깼다. 어떤 꿈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꿈 때문에 깼다는 것은 분명했다.

 잠에 어떻게 드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을 잃는 것과 비슷하다. 방을 어둡게 하고 자리에 누워 눈을 감는다. 이제 잠에 들어야지, 같은 생각 따위가 정말 잠에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그저 눈을 감고 있다가 어느 순간 쥐도 새도 모르는 게 잠이 드는 것이다. 나는 그 기분이 좋지 않다. 잠에 드는 것은 결코 나의  의지로 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것을 밤마다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밤은 아마도 그  것을 한 번 더 해야 한다. 최악의 밤이었다.



 잠이 오지 않는다. 정확히는 언제 올지 모른다. 침대에서 발을 꺼내 작은 테이블 위에 저녁에 사 놓은 빵 봉투를 집어 든다. 호텔 침대는 내가 누운 자리만 헝클어져있다. 옆자리는 처음 그대로 주름 하나 져 있지 않다. 베개도 봉긋하다. 시간은 새벽 두시였다.

 포트에 새로 물을 끓이기 귀찮아 나는 식어서 차가워진 커피에 남은 도넛을 한 개 먹었다. 잠에 들기 전 양치했지만 어차피 잠에서 깼으니 상관없었다. 나에겐 오늘 두 번째 밤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테이블 옆 작은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오물오물 도넛을 씹어 먹는다. 옆방인지 위, 인지 알 수 없는 어느 방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 들어온다. 그렇게 싸구려 호텔은 아닌데, 방음이 약한 건지 신음 소리가 큰 건지 알 수 없다. 저들은 지금이 첫 번째 밤일까 두 번째 밤일까. 나는 호로록 식은 커피를 마셨다. 여자 신음 소리는 간격이 짧아지고, 이따금 남자의 목소리도 들린다. 나는 도넛을 한 입에 욱여넣고 무말랭이처럼 어느 커플의 섹스 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떤 걸 탓할 수야 있나.

 나는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입고 읽으려고 가져온 책을 챙겨들고 호텔 밖으로 나갔다.






 맛이 꽝이어도 그냥 뜨거운 커피에 책을 읽을 조명만 있으면 되었는데 그마저도 없었다. 나는 옆구리에 어니스트 베커의 책을 끼고 한참을 걸어 다녔다.

 그러므로 내가 이 작은 바에 들어서게 된 건 '일어 날일'이었다.

골목길 어귀에 지하로 내려가는 어두운 나무 계단, 그 문 너머에서 희미하게 쳇 베이커의 노래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새벽 공기가 더 추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망설일 것 없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바는 어두워 크기를 파악할 수 없었고 대신  Everything Happens To Me가 공간을 온통 메꾸고 있었다. 격식을 갖춰 차려입은 중년의 바텐더는 옆구리에 책을 낀 나를 보았다.

"죄송하지만 남은 자리가 저쪽뿐인데, 괜찮으십니까?"

 그가 가리킨 곳은 바로 옆에 화장실이 붙어 있는 구석자리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올리브를 특별히 더 추가한  마티니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늦은 시간이어도 피곤이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저마다 얼굴을 가까이 맞대고 이야길 나누고 있었다. 어느 테이블에선가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지만 담배 냄새라면 진저리치는 내가 이상하리만큼 아무렇지 않았다. 어쩌면 내 몸은 조금 얼어서 긴장이 된 상태고, 바 안의 목재와, 갖은 알코올 냄새로 신경이 그리 예민하지 못했을는지 모른다.

 가름끈을 잡고 페이지를 넘겼다.


<.... 생명을 유지하는 일에 심리적 에너지를 이토록 끊임없이 쏟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만큼 끊임없지 않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자기 보전이라는 용어 자체가 분해의 힘에 맞서는 노력을 함의한다. 이 노력의 정서적 측면은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을 끊임없이 의식한다면 우리는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할 것이다.  ...>


의자가 알맞았다. 적당히 등을 구부리고 책등을 테이블 끝에 맞추고 앉아 읽기에 높이도 적당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자기 보전이라는 용어 자체가 분해의 힘에 맞서는 노력을 함의한다에 체크해 둔다.

 그때 테이블에 클래식한 디자인의 마티니 잔이 놓인다. 특별히 주문한 만큼 올리브가 넉넉하다. 나는 다음 문장을 마저 쫓는다.


< ....   우리가 그나마 편안하게 살아가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적절히 억압해야 한다. 우리는 억압이라는 것이 그저 무언가를 치우고 무엇을 어디에 치웠는지 잊어버리는 것에 지나  지 않음을 잘 안다. 억압은 뚜껑을 닫아두고 내면의 경계를 결코 늦추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심리적 노력을 유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저 시기에 우리는 자신의 육체적 불멸을 온전히 믿는 양 자신의 죽음을 실제로는 결코 믿지 않으며 살아간다. 우리는 죽음을 정복하고자 한다>


문장을 막 다 읽었을 때 나는 네 가지를 깨달았다. 하나는 쳇 베이커의 연주가 끝나고 조니 그리핀의 연주가 새로 시작되었다는 것과, 내 앞에 마티니를 가져다준 사람이 아직 그대로 서 있다는 것,








"What's New? 적절한 선곡이네요."

앳돼 보이는 남자가 싱긋 웃는다.

"합석할 수 있는 자리가 여기뿐이라고 해서요.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앉아도 될까요?"

남자는 내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나는 몸을 들썩이며 자리를 다시 잡는 모션으로 합석을 동의했다. 남자는 이미 자신 몫의 술을 한 잔 들 고 있었다.

 나는 그가 휴대폰이라든지, 하다못해 바 어딘가 비치된 잡지라도 읽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히 등을 기대곤 음악을 들으며 술을 아주 조금씩 마시는 것이 전부였다.

"... 죽음의 부정이란 책 아닌가요?"

나는 책을 읽던 눈을 들어 남자를 보았다. 그가 술을 좋아하세요 하던가 이 시간에 왜 나와 있으세요라는 질문을 했다면 자판기처럼 어쩔 수 없이 대꾸해야 하는 그런 말을 뱉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내가 읽고 있는 책을 알고 있다면? 그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이 책을 아시나 보군요."

"제 여자친구가 한동안 그 책을 들고 다니면서 읽는 걸 봤었죠.  저도 읽어보았지만 영웅주의라든지 하는 말이 와닿지 않더라고요."

 남자의 눈빛이 지루해 보였다.

"죽는 게 두려우세요?"

남자가 묻는다. 질문을 받고서 나는 되짚어본다. 나는 죽음이 두려운가?

"죽음이라는 게 참 막연해요. 그 실체를 분명히 안다면 그게 두려울까요? 말 그대로요. '죽음'만 놓고 보면요."

남자는 자세를 고쳐 앉는다. 나도 책을 덮고 한쪽으로 미뤄 놓는다. 대화라는 건 어쩌면 이렇게 시작하는 게 제일 이상적일지 모른다. 손을 비비며 자, 우리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라고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매력적이기도 하고.



"서문에 보면 아마 이런 글이 있었을 거예요. 죽음은 인간 활동의 주된 원동력이다."

나는 조금 전 읽었던 문장을 상기해 본다.

"근데 얼마 전 미국의 유명한 가수의 인터뷰를 봤는데 그러더라고요. 사람은 결국엔 다 죽게 된다. 최고였던지, 최악이었던지 죽음으로써 결국에 나를 기억하는 이가 하나도 없게 되고 그 사실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 전 이 말이 그렇게 좋게 들리진 않더라고요. 죽음이 지우개 같은 건가 싶고. 어차피 내가 죽어서 아무도 기억 못 하게 될 거, 편한 대로 살겠다는 말 같잖아요."

마티니를 한 모금 마신다. 근래 마셨던 마티니 중 최고였다.

"죽음은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리셋 버튼 같은 의미도 되는 거죠. baam! 나 사라짐! "

남자는 손으로 폭탄이 터지는 시늉을 낸다.



"제가 생각한 요지는 이거예요,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우리는 죽음 이후를 두려워한다는 거. 보세요. 그렇다면  사실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어요. 죽음 이후를 걱정해야지."

"죽음을 지나야 죽음 이후니까,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 순서 아닌가요?"

"그렇다면 죽음은 삶을 살고 난 다음이니까 사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게 맞는 걸까요?"

남자는 피부가 참 하얬다. 그저 멀겋게 하얀 느낌이 아니고 오래 고와 뽀얗게 우러난 빛이었다. 백색보다 아주 밀도 높은 진주색이었다. 나이는 몇이나 되었을까. 얇고 짙은 눈썹이 바른 이마와 커다란 눈 위에 흔들림 없이 그어져 있었다.  아주 잘생긴 얼굴이었다. 나는 이제야 남자가 누구일까 궁금해졌다.

"아까 말했던 여자친구 말이에요."

남자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한 대 피우실래요?"

나는 사양했다. 남자는 담배 한 개비를 입술 사이에 물고 테이블 한편에 놓여있던 재떨이를 가져다 놓고 성냥의 불을 그어 담배에 붙였다.

"자살했거든요. 작년에."

남자의 담배가 하얗고 가는 손가락 사이에 놓였다. 나는 속으로 저런 손은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이쁘고 고와서 담배는 어울리지 않았다.

"저희는 정말 평범한.. 그런 '사람'이었거든요. 만나면 근처 대학교 캠퍼스 안을 산책하고, 스파게티보다 사이드 샐러드가 맛있어서 시키는 토마토 파스타를 한 접시씩 먹고, 작은 무인 책방에 들러 읽고 싶은 책을 빌려서, 집에서 한참 책을 읽다가, 섹스를 두 번쯤 하고서 저는 커피를 마시고 여자친구는 홍차를 마셔요. 레몬이나 우유를 넣지 않은 그냥 홍차요. 낮잠을 자기도 하고, 저녁엔 다시 산책을 나가요. 도통 언제 오는지 모르는 핫도그 트럭을 발견하면 저녁으로 사 먹기도 하고요. 하지만 저도 여자친구도 트럭 아저씨에게 이곳을 찾아오는 요일이나 기준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어요.  그 트럭을 발견하는 게 하나의 기쁨이었거든요. 정확히 알게 되는 건 어쩌면 조금 슬픈 일일지도 몰라요."

남자는 길게 담배를 한 모금 빤다.



"여자친구가 자살을 왜 했는지는 알 수 없어요. 그저 그렇게 된 거예요. 떨어진 책이 아무 페이지나 펼쳐지는 것처럼. 죽음이 두렵지도 않고, 죽음 이후가 걱정되지 않았던 걸까. 근데 말이에요. 요즘 들어서 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요."

나는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남자도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하지만 이내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내 시선이 불을 지핀 것 같았다.

"어쩌면 죽음이 너무 두려워 빨리 해치워 버린 건 아닐까 하는 거예요."

남자는 뒷말을 붙였다.

"용감한 척해도, 겁이 많은 아이였거든요."



담배연기가 어지럽게 공간을 헤집어 놓는다. 남자는 담배를 손에 쥔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내 곁을 스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는 허공에 맴도는 연기를 의미 없이 쫓고 있었다. 잠시 머릿속에서 좁은 매트 위에 따듯한 커피와 우유나 레몬을 넣지 않은 홍차를 손에 들고 있는 그들을 상상해 보았다.  남자의 말대로 그들은 참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문득 아까 내가 깨달았던 것들이 떠올랐다. 기왕 What's New라면 서지 챌로프를 듣고 싶다는 것, 뚜껑이 열리면 누구도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것.

연기가 모두 흩어지고서 한참 후에도 돌아오지 않는 남자가 걱정되어 화장실로 가봤지만 그 안엔 희미한 담배 냄새 말곤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째선지 남자의 말이 귀에 남는다.

'정확히 알게 되는 건 어쩌면 조금 슬픈 일일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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