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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노 Jan 16. 2022

그녀의 페니스




늦은 아침이었다. 주말인가 했는데 생각해 보니 이제 금요일이 된 참이었다. 몇 달 전만 해도 사무실에 앉아 업무를 보던 시간이다. 교정을 보고, 가편집을 하고 최종적으로 한 번 더 교정을 본 후 인쇄소에 편집본을 넘긴다. 그러면 하루가 지난 같은 시간에 수정해야 할 부분이 체크되어 메일함에 담겨있다. 최종적은 그 앞에 1차 2차 3차를 더 해간다. 말만 최종이지, 최종을 바라는 문서는 끝을 모르고 수정 부분을 만들어 낸다. 완벽히 마무리된 문서는 없다. 이 정도면 됐다, 싶은 문서만 만들어진다. 무한대로 늘어가는 'n차의 최종적'을 버틸 재간이 없다. 포기와 만족은 어쩐지 멀지 않은 일일지 모른다. 마음먹기에 달린 것뿐이다. 그럴 바엔 만족 인편이 낫지 않나, 싶은 것뿐.



 한동안은 글자들을 보지 않아서 좋았다. 콧등에서 떨어질 줄 모르던 안경을 벗고, 되도록 눈을 쉬게 해 주었다. 잘 챙기지 않던 아침을 지어먹고, 산책을 하고 저녁엔 주로 음악을 듣는다.  온전히 쉰다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다 보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회복의 첫 시작은 관계를 덜어내는 것부터였나 싶을 정도였다. 누군가와 연락을 하는 것도, 여자를 만나는 것도 귀찮기만 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지나니, 어리석게도 글이 보고 싶어졌다. 아침을 지어먹고, 산책을 하고 저녁엔 주로 음악을 듣는 생활의 산책과 저녁 중간에 도서관에 들리는 일정이 추가되었다. 글자의 '안녕'을 살피는 게 아니라 글의 '내용'을 읽는 즐거움이 아주 오랜만이었다. 책을 읽느라 요새 아침은 늦는다. 책을 읽다가 늦는 아침이라니, 참 황홀한 일이다.



 새로 들인 찻잎을 우리기 위해 부엌으로 건너가 두 개의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물이 끓을 때까지 화장실로 가서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한다. 나와서 주전자 하나를 내려 티포트와 찻잔에 담아 놓는다. 꽤나 어렵게 구한 티포트였다. 대부분의 티포트는 꽃무늬가 그려져 있다거나, 금박이 둘러져 있었는데 어찌어찌 타협을 해본다 하고 봐도 도저히 사용할 수가 없을 것 같아 오랜 배송을 기다려 페니카 티포트를 샀다. 티포트를 뜨거운 물로 예열을 해 놓고 나머지 주전자의 물이 팔팔 끓기를 기다린다.

 찬장에서 찻잎이 담긴 틴 케이스를 꺼내는데 그때 소파에 던져둔 핸드폰에 진동이 울린다. 티포트에 물을 쏟아 버리고 티스푼으로 찻잎을 두 스푼 넣어 준다. 그 상태로 두고 나는 소파로 가 휴대폰을 들어 문자를 확인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지만 아는 번호였다.  휴대폰을 들고 돌아와 끓고 있는 물을 티포트에 붓는다. 차가 우러나는 동안 문자를 다시 확인한다.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

 자신이 누구며, 형식적인 안부의 인사도 없다. 자신에겐 나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는 내용뿐이지만 그가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나는 누군지 알고, 나에게 잘 지내고 묻지 않아도 잘 지낼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어떤 부탁인데?]

찻잔에 우린 홍차를 마신다. 다음번엔 찻잎을 한 번 더 넣어볼까라는 생각을 하던 차에 답장이 온다.

[운전 연습 좀 도와줘.]

그녀와 내가 연락을 안 한 지는 거의 일 년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헤어졌다고 말하기엔 그전에 사귀는 사이라는 말부터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사이다. 우리는 종종 만났다. 그녀가 언제 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볼 수 있을 때 나를 보러 왔다. 그것이 편하다고 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내 사정'이라고. 덧붙여 이런 말도 했다. '당신의 사정은 당신의 것'. 내가 피곤해서 쉬고 싶어 할 때 그녀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 알겠어, 좀 푹 쉬도록 해'라고 다정하게 말해주는 것뿐이다. 그녀는 각자의 사정을 두루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언젠지 모르게 연락이 뜸해졌다. 그건 아마도 그녀의 사정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헤어졌다고 말하기엔 뭔가 걸리는 게 있다. 우리는 만난 적도 없고 헤어진 적도 없다.

[그래, 내가 도와줄게.]

[30분 뒤에 공원에서 보자.]

휴대폰을 식탁에 두고 냉동 스콘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오늘 아침은 이것으로 대체한다.





먹구름 위로 해가 있었다. 공원 갓길에 흰색 닛산 큐브 한 대가 서 있다. 그쪽으로 다가가자 조수석 창문이 내려간다. 일 년 만에 본 그녀는 머리가 가슴께까지 자라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그녀는 긴장한 탓인지 어깨가 솟아 있었다.

"스쿠터는 어쩌고?"

그녀는 싱긋 웃었다. 기억하고 있었네, 라는 느낌의 웃음이었다.

"아이 유치원 등하교를 해야 하거든. 운전을 안 한 지 너무 오래라, 겁이 나서."

그렇구나, 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아이가 이제 유치원에 다니는구나, 업데이트된 정보를 소화해 내는 데 그녀가 말한다.

"나와줘서 고마워."

"뭘, 어려운 일도 아니야."

나는 조금 뜸을 들이다 덧붙인다.



".... 어쩌면 헬멧을 가져왔어야 했을까?"

"하하!"

그녀는 예전처럼 눈을 반달로 지으며 웃었다. 조금은 긴장이 풀린 듯했다.

"준비됐어?"

내가 말하자, 그녀는 잠깐만, 하며 신고 있던 신발을 벗었다.

"맨발로 운전하는 게 편한걸. 신발을 신고 있으면 어쩐지 아무것도 밟지 않는 기분이야. 내 발이 좀 예민하잖아."

나는 신발을 벗은 그녀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발이 얼마나 예민했는지는 잠자리에서 알 게 되었다. 그 정도의 예민함이라면 운전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겠다 싶었다. 그녀는 벗은 발로 천천히 엑셀을 눌렀다.  


 걱정한 것치곤 운전은 안정적이었다. 작은 차 안에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렸다. 예전 방에서 울리던 숨소리와는 달랐지만 공간 안에 숨소리만 존재한 다는 건 비슷했다.

"노래라도 틀까?"

"아니, 미안."

그녀는 운전에 집중한 채로 말했다.

"커브를 돌 땐 속도를 좀 낮추는 게 좋아."

내 말에 따라 그녀는 속도를 낮춘다. 한적한 동네에 낮 시간이라 그런지 도로에 차가 한 대도 없었다.

우리는 천천히 동네 한 바퀴를 크게 돈 참이었다.

"머리 많이 길었네. 짧은 것도 잘 어울렸어."

"고마워, 나도 생각보다 긴 머리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아."

그녀는 힐끗 백미러를 보며 깜빡이를 켜고 옆 차선으로 옮긴다.



"머리도 기르고. 치마도 좀 입고했더니 내가 여잔 줄 아나 봐."

그녀가 키득거린다.

"그래? 재밌는 일이네."

"자기는 알고 있었어?" 그녀는 즐거워 보였다.

"적어도. 네가 '완전한 여자'는 아니라는 건 알았지. 그렇다고 내가 특별나다는 뜻은 아니지만."

"드문 일이지. 여차하면 나한텐 길거리에서 16 shots에 춤추는 게 일도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은 없거든."

"너에 대해서 모르다니, 그 사람들에겐 애석한 일이네."

그녀는 신호에  맞춰 정지선에 멈췄다.

"어느 날 내가 팬티를 내렸는데, 페니스가 달려있다 해도 자긴 놀라지 않을 것 같아."

"그게 네 사정이라면, 놀라더라도 놀라지 않은 척해 볼게."

신호가 파란 불로 바뀌었지만 그녀는 나를 바라보기만 하고 출발하지 않았다.



"그런 나와도 만날 수 있다는 거야?"

"내게 뒤돌라고 한다면 조금 고민은 되겠지만."

"그거 아쉽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싱긋 웃으며 출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다시 멈췄다.

"길이 끝이네."

"무슨 공과대학이 들어온다고 도로를 뚫었나 봐."

우리는 활주로처럼 쭉 뻗어 있지만 칼라콘으로 막힌 도로 앞에 있었다.

"오늘 고마웠어."

"나도. 너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

나는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돌아가는 길에 한번 멈춰 창문을 내리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며 나는 페니스가 달린 그녀를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서툴지만 집중해서 운전하며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춤을 추는 그녀도 상상한다. 긴 머리에 치마를 입은 그녀도 있다. 다짜고짜 부탁이 있다며 연락하는 그녀도 있고,  발가락을 애무하면 쓰러지듯 신음을 토해내는 그녀도 있다. 그리고 그 외에도 무수한 'n차의 그녀'를 생각해 본다.

 나는 도통 버틸 재간이 없어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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