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렌즈는 죄다 흠집이 나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제서 초극세사 안경닦이 수건으로 닦아도 소용없다. 렌즈는 잔 흠집으로 가득해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버리게 된 안경만 열 개가 넘는데 아직도 버릇을 못 고치고 S는 새 안경을, 입고 있는 무엇으로든 닦았다. 티셔츠 일 때도 있고, 잠옷일 때도 있었다. 집에 오면 바로 안경부터 찾는 것치고 관리가 엉망이었다. 관리의 필요성을 느꼈지만 이상하게 안경을 닦아야 할 때면 안경닦이 수건이 보이지 않았다. 눈에 보였다면 S도 티셔츠로 안경을 닦지는 않았을 것이다.
변명이라기보다, 변명이긴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S가 그러한 것을 탓할 수 없다. S는 안경을 매번 안경닦이로 닦을 성격이 되지 못한다. 어쩌면 S는 애초에 그런 운명일지도 모른다. 안경 렌즈에 흠집이 가득해서 매번 새로운 안경을 맞추게 될 운명 같은 것. 다만 이번에 맞춘 안경은 꽤 마음에 들었던 것이라 아쉬웠다. 그러면 관리를 잘했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얘기는 처음으로 돌아가고, 결론은 똑같다.
고칠 수 없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생각이 꼬리를 무는 것도 그렇다. 꼬리가 없는 생각은 없다. 숨바꼭질 못하는 여우 마냥 잊었다 싶을 때 저기 문틈 사이로 삐져나온 꼬리가 보이는 것이다. 그 문을 열면 여우는 재빠르게 도망간다. 그렇게 멀어져 가다가도 살짝 열린 서랍 틈에서, 장롱 밑에서, 수화기 너머로 꼬리가 보인다. 꼬리가 없는 생각은 생각할 수 없다.
그녀의 자동차 키홀더에 그 꼬리가 달려있다. 정확히 무슨 동물의 털인지는 모르지만 오렌지빛의 물방울 형태로 된 부드러운 털 뭉치.
S는 카페 테이블에 올려진 키홀더를 보다가 '무슨 동물'이 어쩌면 그녀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침에 일어나 볼 뽀뽀로 아이를 깨우고 학교에 데려다준 다음 회사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업무를 보고 퇴근길에 간단한 장을 본 후 저녁을 차리고 식사를 마친 후에 혼자 방에 들어갔을 때. 그때 그녀는 온종일 뒤집어썼던 거죽을 벗어내고 탐스럽고 보드라운 털을 꺼낸다. 정성스레 빗질을 한 다음 스스로 만족감에 취해 침대에 몸을 둥그렇게 말고 꼬리로 온몸을 감싸듯 휘감은 채 잠에 드는 것이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자신의 털을 모아 실에 꿰어 키홀더로 하고 다니는 것은 은밀한 자신의 비밀을 남들 앞에서 드러냄으로써 쾌감을 얻기 위한 것일지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이 털이 그녀의 것이란 걸.
그녀는 어느샌가 S의 앞에 앉아 있다. 익숙한 듯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손목시계를 본다. S는 후다닥, 화분 뒤로 숨는 여우꼬리를 못 본 체하고 그녀를 마주 본다. 안경의 잔 흠집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S가 안경을 티셔츠로 닦으려고 하자 그녀가 가방에서 안경닦이를 꺼내 준다.
그녀는 그런 운명이다. 자신의 앞에서 대충 안경닦이가 없으면 티셔츠로 안경을 닦는 사람에게 안경닦이를 챙겨주게 될 운명. S가 알기로 그녀는 안경을 쓰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건 없는 거 같아." 그녀가 무던하게 말한다. 맥락 없는 서두였지만 S는 그러려니 한다. 그녀도 어디선가 여우꼬리를 본 것일지도 모르니까.
"변하지 않는 것도 있지."S는 생각해 본다. 그녀가 본 여우꼬리는 무엇이었을까. 쉽게 떠오르지 않아 S는 말을 잇는다. "변하지 않는 건 없다는 전제가 변하지 않잖아. 변하지 않는 건 없으니까. 변하지 않는 건 없다는 전제가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거지."
S는 말을 마치고서야 그녀의 여우꼬리는 자신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차에서 내리는 S에게 안경닦이를 건네준다. S는 받아 들긴 했지만 이게 소용 있을지는 모르겠다. 운명은 그렇게 태어났고, 변하지 않는 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