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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노 Jan 18. 2022

결말인 채 하는 현상



발가락.

전철에 발가락들이 천지다.

샌들 밖으로 튀어나온 열 개의 발가락들. A는 시선을 옮기다 그것에 부딪히는 것조차 싫어 고개를 위로 올려버린다.

이상한 일이다.

그저 발가락인 것을. 그저 손가락인 것처럼.



유난히 덥고 습한 날이었다.

일 때문에 입어야 하는 회색 정장이 괴물의 가죽처럼 느껴졌다. A는 그러지 않아도 조만간 옷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싶은 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괴물의 가죽처럼 느껴지는 건 어느 정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서류 한 장.

한 장이 안 보였다. 오래된 미신처럼, 엘리베이터가 1층, 2층, 3층하고 5층으로 넘어가듯 서류 페이지가 1, 2, 3 하고 5로 가버린다.

A는 억울하다. 정작 자신의 아파트는 4층이었기 때문이다. A는 미신 따위는 믿지 않는다. 4페이지를 빼먹을 리 없다.

맞은편 거래처 직원의 얼굴에 답답함과 짜증이 담겨있다. A는 이럴 리 없는데,라고 중얼거리며 가방을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이럴 리가 있게 되어 버렸다.

4번째 페이지는 어디로 갔을까.

1과 5도 그대로인 마당에, 마지막 결과를 두고 4는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시작도 잘해 놓고 결과도 있는데 마무리를 앞두고 4가 사라져버렸다.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그건 결과가 아니라 현상일 뿐이다. 1과 2와 3이 벌여 놓은 결말인 채 하는 현상.



지친 몸을 이끌고 시내로 가는 전철에 올랐다. 낮 시간이라 붐비지 않았지만 의자에 빈자리는 없다.

A는 그때 무심결에 보았다. 맞은편 의자에서 꼼지락거리는 길고 뾰족한 발가락 들을.

플립플롭, 흔히 쪼리라고 불리는 신발에서 삐쭉 튀어나온 발가락들. 맞은편에도 그 옆자리에도 그 옆에도. 20개가 넘는 발가락들이 말미잘처럼 꼬무락 거린다.

혼란하다.

남의 발가락을 보는 건 묘하다.

 남.의. 발. 가. 락. 소리부터 이상하다.

남의 발가락을 보는 건 은밀한 기분을 들게 한다. 그러니까, 남의 발가락을 보고 있자면 낯부끄러워지는 것이다.

그런 발가락들이 20개 넘게 A의 앞에서 꼬물거리고 있다.

생긴 것도 제각기, 길이도 제각각이다.







여자의 탄탄한 허벅지에서 이어지는 하얀 종아리가 곧은 발등으로 이어지고, 얇고 긴 발가락으로 끝이 난다.

남자는 양쪽으로 벌어진 여자의 발목을 잡고서 그녀의 엄지와 검지 발가락 사이를 핥는다.

여자의 등이 활처럼 휜다.

여자가 팔을 뻗어 남자의 팔뚝을 잡는다.






A는 그저 남의 발가락이 불편할 뿐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발가락을 내보이는 신발을 신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냥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남의 발가락을 마주 봐야 할 땐 될 수 있으면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다.

다만 아까부터 맞은편 발가락이 A의 눈이 닿는다 싶으면 여지없이 발가락을 꿈틀거렸다. 발가락은 길기도 길어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듯했다.

상상 속에서 참 여러 가지를 이뤄내는 발가락이다.



A는 허공에 시선을 묶고 생각해 본다.

대체 4페이지는 어디로 갔을까.

이런 마무리는 맺고 싶지 않았는데.

시작점을 지나 길고 먼 중간을 지나 이제야 결말인데, 그 결말로 향하는 내리막길을 이렇게 뭉개버리고 책임감 없이 사라지다니.

더군다나 미신을 믿지도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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