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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노 Jan 25. 2022

델마



캄캄한 방 안이 번쩍하고 환해졌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거센 빗방울이 유리창을 끊임없이 쳐 대고,  멀리 어느 하늘에선가는 우르르 쾅 하는 천둥소리도 들려왔다.

  델마는 이불을 덮고 침대 등받이에 기대앉아 있었다. 스위스군이 사용했다는 낡은 랜턴 안 초는 창틀 사이로 거세게 불어오는 폭풍우에 금방이라도 꺼질 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델마는 엄지손가락을 입에 대었다. 어머니가 싫어하는 버릇이었다. 몇 번이고 주의를 받았지만 고칠 수가 없었다.  불안하거나 초조할 때면 델마는 엄지손가락을 입에 대고 살짝 깨물기도 했다가, 입술을 짓누르기도 했다. 그런 불안한 마음이 들 때 나오는 버릇이 조금 더 멋졌다면 어땠을까. 예를 들어 발레를 한다거나, 시 낭송을 한다거나. 그렇다면 어머니가 매서운 눈으로  손등을 때리는 일은 없었을 텐데. 델마는 도톰한 자신의 윗입술을 만지며 그런 생각을 했다.

끊임없이 천둥이 울렸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천둥소리가 마치 올라가선 안되는 하늘나라의 거대한 성벽을 깨부수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어딘가에서 바벨탑이 결국 하늘에 닿은 건 아닐까.



 몇 주간 내리는 긴 비로, 선생님이 찾아온 건 참 오랜만이었다. 델마는 선생님이 좋았다. 그녀는 청색 드레스에 크림색 카디건을 걸치고 왔다.

"안녕, 델마. 잘 지냈니?"

 그녀는 짙은 녹색 눈동자를 델마에게 맞추며 다정하게 인사했다. 델마는 살짝 무릎을 굽히며 수줍게 "네, 오셨어요?" 하고 인사했다. 어머니가 다가와 선생님의 레이스 우산을 받고서 굳이 이런 날씨에 안 오셔도 되셨는데,라고 말하자 선생님은 기품 있는 미소로 아닙니다, 수업이 더 이상 미뤄질 순 없지요. 하며 따듯한 눈으로 델마를 내려다보았다. 델마는 얼굴이 빨개져서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우르르 쾅!

천둥소리와 함께 또 한 번 번쩍 방안이 밝아졌다.  빗소리가 너무도 거세서 델마는 생각을 이어나가기 힘들었다. 그래도 집중하기 위해 델마는 사정없이 흔들리는 랜턴 안의 촛불을 바라보았다. 찬 바람이 발가락 사이로 들이찼다.

 선생님은 델마의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델마는 엄지손가락을 입에 대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방 안엔 오로지 비가 나무 지붕 위로 떨어지는 소리뿐이었다.

 "그림은 아주 좋은 걸."

델마는 애꿎은 자신의 드레스를 쥐었다 폈다 하며 선생님의 말을 곱씹었다. '그림은?' 그림은 좋았다 라면, 어떤 것은 안 좋다는 것일까. 델마가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다가 살포시 고개를 들자, 녹색 눈 동자 두 개와 마주쳤다.



 이상한 일이다. 델마는 늘 생각했다. 녹색 눈동자는 무엇을 보고 있는지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 델마의 짙은 눈썹과 조금 내려간 눈꼬리, 작은 코와 도톰한 입술이 담겨 있는 얼굴을 보는 것은 아님이 분명했다. 틀림없이 그 안의 것을 보고 있었다. 델마의 생각이라든지, 영혼이라든지. 아니면 그 너머의 우주라던가. 녹색의 눈동자 앞에선 모든 것이 발가벗겨진다. 그 앞에 서면 누구나 무장해제되고 티끌 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그것은 두려운 동시에 해명할 수 없는 기묘한 쾌감을 느끼게 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나 어떤 상황 속에서 어느 정도의 보이고 싶은 욕구와 자기 체면을 위한 적당한 연기를 해야 하는데, 그것이 전혀 소용없게 되는 절대적인 존재 앞에서 어쩌면 해방감을 느끼는 지도 모른다.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지 스스로 알고 있니?"

 몸이 으스스 떨려온다. 델마는 힐끗 유리 창을 바라본다. 바람이 얼마나 거센지 작은 틈으로 유리가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나뭇가지가 축 늘어져 쉴 새 없이 흔들린다.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델마는 그런 거창한 건 모르겠다. 그런 게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모르겠다를 시작해야 할까. 말하고자 하는 게 없다면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는 건지, 아니면 그것이 없는 그림은 의미가 없는 건지. 애초에 무엇을 그리기로 마음먹은 것이 전달하려는 것인지, 하지만 정확히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다면 없다고 봐야 하는지. 결과적으로 선생님의 질문에 델마는 대답할 수 없었다.

 질문을 파고들수록 델마는 알 수 없어졌다.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이.



톡톡

작았지만 분명한 의지가 담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델마는 방문으로 시선을 보냈지만 그곳이 아니었다.

톡!  

 문을 열어달라는 의지는 방 문 쪽이 아닌 창가였다.

델마는 잠시 망설이다 창가로 다가갔다. 밖에 누군가 흠뻑 젖은 채로 서 있었다. 아이는 얼굴로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소매로 닦아내며 입모양으로 '문 좀 열어줘'라고 말했다.

 어쩌지, 하다가 델마는 걸쇠를 풀고 유리창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매서운 폭풍우가 델마의 이층방으로 들이닥쳤다. 아이는 잠시 이리저리 지형을 살펴보더니 능숙하게 나무를 타기 시작했다.

 아이가 델마의 이층 창문으로 온 것은 순식간이었다.



"안녕, 델마! 잘 지냈어? 비가 참 많이 온다, 그치?"

아이가 씩 웃었다. 델마도 아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 늦은 밤 폭풍우 속에서 왜 그가 자신의 창밖에 서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델마는 문득 아이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얼굴은 분명 그 아이였는데, 분명 그 아이가 아니다. 델마는 알 수 있었다.

"넌, 내가 아는 그 애가 아닌 거 같아. 넌 누구니? 어째서 그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델마."



 아이의 젖은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아이는 베이지색의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다. 물론 비에 온통 젖어 몸에 딱 붙어버려 베이지보단 몸 본연의 색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네 말이 맞아. 나는 네가 아는 그 아이가 아니야. 하지만, 나는 그이기도 해. 분명히 다르긴 하지만. 너라면 나를 알아볼 줄 알았어."

아이는 조금 신나 보였다. 자신을 알아봐 주는 것에 대해서. 하지만 델마는 자신이 어떻게 그 둘을 구별해 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르르 쾅!

천둥이 또 한 번 울렸다.

"나랑 함께 가자."



아이가 말했다. 델마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아이는 흔들림 없는 눈과 옅은 미소로 마주 볼 뿐이다.

"어디로?"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델마는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이는 멀어지는 델마를 보고 조금 처연한 표정이 되었다. 세차게 쏟아붓던 빗소리가 조금 멀어졌다고 델마는 생각했다.

"그럴 수 없어. 나는 여기가 내 집인걸."

"집이 네가 있어야 할 곳이야?"

"그야, 집이..."

델마는 말끝을 흐렸다.



오래 이어지는 침묵에도 아이는 꿋꿋이 기다려주었다. 이대로 두면 빗속에 잠겨버릴 듯싶을 정도로.

한참이 지나 델마는 입을 열었다.

"나를 어딘가로 데려다줘. 이곳이 아니면 돼. 어딘가 근사하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들이 있는 곳으로.  너를 따라가면 나를 데려가 줄 거니?"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델마는 어깨에 둘렀던 숄더를 풀고 창틀을 붙잡고서 아이가 딛고 있던 나뭇가지 위로 발을 뻗었다. 세찬 비바람에 버터 색 잠옷 원피스가 금세 젖어버렸다.  

 아이의 뒤를 따라 얼마나 걸어갔는지 알 수 없었다. 비가 너무도 거세고 하늘에선 끊임없이 천둥과 번개가 몰아쳤다.



"델마, 겁먹으면 안 돼. 앞을 똑바로 봐야 해. 안 보여도 보려고 해야 하는 거야."

아이는 뒤따라오는 델마를 한 번씩 챙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머지않아 드넓은 들판에 다다랐다. 바람에 나부끼는 어두운 들판을 보고 있자니 정신이 아찔해졌다. 델마는 아이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부지런히 따라가고 뛰어도 봤지만 앞서 걷는 아이는 점점 작아질 뿐이었다. 결국 델마가 자리에서 넘어지고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을 땐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루이스!"

델마는 소리쳤지만 외침은 어느 곳에도 닿지 못했다.





다음 날 눈을 뜬 델마는 스위스 군이 썼다는 낡은 랜턴 안의 촛불을 끄고서 맞은편에 걸려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분명 델마의 얼굴을 한 아이가 마주 보고 있었지만 그곳에 델마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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