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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아 Oct 27. 2024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

독서일기 『로드』 (코맥 매카시, 문학동네)

마스크로 얼굴의 반을 가린 채 살아가는 세상에서 어느덧 세 번째 봄이 지나가고 있었다. 길가의 은은한 꽃향기는 마스크로 덮인 내 코까지 와 닿지 못하고 그저 바람결에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의 표정은 하얗게 감추어져 모두가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복제 인형처럼 보였다. 많은 이들이 긴 팬데믹 속에서 우울해하고 절망했다.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혼잣말처럼 묻곤 했다. 대체 언제 끝나는 걸까.     


반복되는 고통 속에서 지치고 무기력해져 도무지 힘이 나지 않을 때면 책장에서 꺼내 보는 책이 있다. 코맥 매카시의 장편소설 『로드』. 대재앙 이후 폐허가 되어버린 지구에서 간신히 생존해 남쪽으로 걸어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이 산속에서 보내는 어둡고 추운 밤들, 오래된 통조림과 고인 물 따위로 굶주린 배를 겨우 채우는 모습을 나는 천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읽어나간다. 그런 상황에서 어쩌다 마주치는 타인이란 희망보다는 공포의 대상이 된다. 얼마 안 되는 귀중한 생필품들을 약탈해 가거나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이들. 그런 이들로부터 아이를 보호해야 하는 아버지는 어쩔 도리 없이 타인을 불신한다. 설령 그들 중에 천사나 신이 숨어있다 할지라도. 

     

타인에 대한 불신과 공포를 가질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은 지난 몇 년간 우리가 살아낸 코로나 시대의 풍경과도 은근히 겹쳐졌다. 그러나 소설에 묘사된 잿빛 풍경과 주인공의 절망스런 현실을 읽어나갈 때, 나는 작고 사소했던 나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했던 것인가를 새삼 느끼게 되면서 묘한 위로를 얻었다. 이를테면 ‘바싹 말라 거의 아무런 맛도 없’는 사과 한 알을 베어 무는 것만으로도 만족해하는 주인공 남자처럼 말이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묵묵히 살아가는 마음, 사랑하는 이의 손을 끝까지 놓지 않는 마음, 그런 진심에 대해 생각하는 일. 그것이 바로 소설 『로드』가 주는 희망이다.     


* 2022년 5월 부산 연제구청 소식지에 수록했던 글을 일부 수정하여 게재합니다.     



- 남자는 사과를 집어들고 빛에 비추어 보았다. 단단했고 갈색이었고 쪼그라들어 있었다. 남자는 천 조각으로 사과를 닦은 다음 한 입 깨물어보았다. 바싹 말라 거의 아무런 맛도 없었다. 그래도 사과였다. (139p)


- 나는 그래도 우리가 아직 여기 있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안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지만 우린 아직 여기 있잖아. (3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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