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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현진 Aug 15. 2024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창문을 열어둔 것인가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11권 13.

누군가가 나를 경멸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다. 내가 할 일은 경멸받을 만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_제11권 13 중에서



아이들이 자면 이사할 집에 페인트칠을 하려고 했다.

윤우와 은서는 잠이 들었다.

안 자고 있는 선우와 옮길 책을 한 아름 안고 먼저 왔다.

불은 훤하게 다 켜져 있고, 방충망 없는 창문 두 곳이 열려 있었다.

불빛을 좇아 들어온 벌레들이 천장에 날아다녔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나는 새라도 들어올까 봐 방충망 없이는 절대 열어 놓지 않는다.

잠시 뒤 올라온 남편에게 툴툴거리며 얘기했다.

남편은 멋쩍어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괜찮다고, 나갈 거라고 했다.

태연한 태도에 짜증을 냈다.

문을 닫았는데 어떻게 나가냐고, 이게 뭐냐고, 무슨 생각으로 불 켜놓고 문을 열어놨냐고, 어떤 행동이라도 하길 바랐다.

몇 시간 전에 깨끗하게 설치하고 간 부엌인데, 도배도 깨끗이 해 놨는데… 날아다니는 벌레를 보며 울상이 됐다.

나방이 푸드덕 거리며 날아오자 으악 소리를 쳤다.

그제야 페인트 하려고 낀 장갑을 벗는다.

불을 끄고 창문을 열더니 먼저 나가라고 한다.


먹고 힘내 보려고 시킨 햄버거가 왔다.

어색한 엄마, 아빠 사이에서 선우는 지금이라도 사과하면 안 되냐고 했다.

아빠는 생각 없이 창문 열어서 미안하다고, 엄마는 아빠에게 짜증 부려서 미안하다고.

우리 둘은 말이 없었다.

햄버거 잘 먹었단 말에 "응." 답하던 남편이 먼저 출발하려 한다.

뒤따라 나서는 우리에게 바퀴벌레, 귀뚜라미 엄청 많다고 오지 말라고 한다.

처음엔 진짜인 줄 알고 또 기겁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엄청 많다는 건 거짓이었다.

화가 난 것이다.


조금 있다가 에프킬라를 들고 가서 화악 뿌렸다.

남편이 안 잡으면 내가 잡는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선우도 전기채를 들고 잡고 있으니 잡지 말라 한다.

벌레가 무는 것도 아니고, 너한테 해가 되는 것도 아닌데 죽여야겠냐고 나 들으란 듯이 말한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데 속으론 남편도 화가 났다.

그 길로 선우를 데리고 돌아와 잤다.


눈 떠서 전날 일을 떠올려 보니 내가 짜증만 안 냈어도 해프닝으로 지나갈 일이었다.

다툼이랄 것도 없었지만, 남편은 내가 한 말이 콕 박힌 모양이다.

일 도우러 온 엄마에게 어제 일을 항변하기도 하고, 내겐 방충망부터 얼른 설치해야겠다며 계속 놀린다.

'무슨 생각으로'를 반복하며 뒤끝을 부린다.

그 단어가 나올 때마다 서로 웃었지만, 상처를 준 말이라 남편에게 미안했다.

'누군가가 나를 경멸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다. 내가 할 일은 경멸받을 만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 말이 꼭 맞다.

당시에는 원인 제공한 남편 탓을 했지만, 내 행동에도 문제가 있었다.

가족에게부터 언행을 조심한다면, 타인에게 경멸받을 일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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