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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덕현 Nov 05. 2024

스타와 배우 그리고 연기

- 배우의 연기와 우리의 삶

우리에게 스타란 무엇일까. 젊은 시절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던 연인이자, 언제나 피곤한 몸을 기댈 수 있는 넉넉한 어깨를 가진 친구 같은 존재일까. 우리와는 다른 별세계에 있으면서 가끔 우리에게 그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화려한 삶을 살아가는 꿈의 존재일까. 아니면 도무지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우리와는 다른 신적인 아우라를 가진 존재일까. 그저 냉정하게 바라봐 자본주의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만들어낸 신을 대체하는 인간상품의 하나일까. 


스타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처럼 극에서 극으로 달린다. 한없이 찬사의 대상이 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끝없는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한없이 동경의 대상이 되다가도, 어느 순간 동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는 그곳에는, 또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충격적인 자살 소식과 거의 폭력에 가까운 근거 없는 끔찍한 루머들이 떠다닌다. 스타와 소속사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면 종종 발견되는 노예계약의 징후들은 대중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 신적인 존재가 노예였다니. 신과 노예의 사이. 지금 스타가 서 있는 자리다.


그들은 실제의 삶과 비치는 삶이 다르다. 그들은 우리에게 있어서 콘텐츠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따라서 그 콘텐츠가 캐릭터로 구현해 내는 판타지나 가상성은 사실상 우리가 받아들이는 그들의 실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실제 삶과는 유리되어 있다. 드라마 속에서 누구나 꿈꾸는 신데렐라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소속사에 계약되어하기 싫은 일이라도 웃으면서 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을 수도 있다. 이 실제의 삶과 비치는 삶 사이에 혼란이 오게 되면 그 존재는 파탄으로 몰릴 위험이 있다. 자살은 꿈꿔왔던 삶과 현실의 삶의 괴리에서 비롯되는 바가 크다. 따라서 스타란 기본적으로 이 극한의 정체성의 혼란과 존재의 괴리감을 감당해야 하는 존재다.


이렇게 된 것은 스타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통해 물질화된 상품인간으로 포장되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삶과 상품으로써의 삶. 이것은 자본주의 세상 속에서 단지 스타만이 겪는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들은 저마다 집에서는 한 아이의 부모이고, 한 부모의 자식이며, 한 아내의 남편이자, 한 남편의 아내이지만, 집을 나서서 자본의 세상으로 출근하게 되면 연봉 얼마로, 회사 이름으로, 또 직함으로 구획되는 상품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니 스타란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의 삶을 가장 극단적으로 표상하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스타에게서 갖는 동경과 동정은 사실상 우리 스스로 자신에게 갖는 감정과 다르지 않다. 스타는 우리에게 그것을 대리하는 존재로 서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타를 꿈꾼다. 그것이 딱히 저 TV와 스크린 속의 인물들이 아닐지라도, 자신의 삶 속에서 스타가 되기를 누구나 바란다. 주목받고 싶고,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문제는 그 가치를 평가 내리는 기준이 돈으로 수치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질적인 가치가 양적인 가치로 등급 매겨지는 그 지점에 현대인들의 비극이 있다. 질적인 가치가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양적 가치가 부여되지 않으면 아무도 그것을 주목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지금은 양이 질을 담보하는 시대다. 일단 양을 채워라! 그러면 질은 따라올 것이니!


지금과는 다른 삶에 대한 희구는 우리의 본능이다. 이미 주목받고 있는 스타들은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드러나지 않는 삶 속에 묻혀있는 이들은 거꾸로 모두의 주목을 받는 스타를 꿈꾼다. 변신 욕구는 우리의 본능이지만 팍팍한 현실에서 변신은 그다지 용이하지 않고 때론 용납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대체하는 존재로서 스타를 희구하게 된다. 스타에 대한 열광과 현실에 대한 낙담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렇다면 스타를 희구하는 우리네 삶은 늘 그 자리에 머물러 현실을 낙담하면서 변신욕구를 스타를 통해 자위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유어 아너'의 김명민

여기서 우리는 스타와는 다른 배우라는 존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먼저 시대가 낳은 명배우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 메서드 연기의 대가 김명민의 목소리부터 들어보자. “제 이름이 아니라 캐릭터만 쭉 올라오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어요. 저 작품을 했던 사람이 이 작품을 했다는 게 의심 갈 정도로 캐릭터의 차별화가 확실했으면... 사람들이 제 이름을 제대로 모르고 못 알아봐도 제가 배우의 길을 제대로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하죠.”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저는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아무리 스타라는 딱지를 갖다 줘도 저는 그거 거절하려고 그랬어요. 저는 그냥 배우로 불리고 싶었고 같은 배우들 사이에서도 ‘저 놈은 정말 연기 잘하는 놈’ 이렇게 인정받고 싶은 게 제 꿈이었어요.”


김명민은 이미 스타다. 하지만 그는 왜 그다지도 스타를 거부하고 배우를 고집하는 것일까. 스타와는 달리 배우란 실체이기 때문이다. 2009년 방영된 김명민이라는 연기자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MBC스페셜'의 타이틀은 아이러니하게도 '거기에 김명민은 없었다'였다. 아마도 이 표현은 연기자라면 최고의 찬사라고 여겨질 것이다. 작품 속에서 연기자가 배역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이름을 지움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들, 바로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다. 그러니 김명민이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작업은 그 직업이 가질 수 있는 스타로서의 욕망을 덜어내고, 대신 그 자리에 온전히 실체로 세워둘 수 있는 배우라는 길을 걸어가는 과정이다. 이것은 한 인간의 존재로 봤을 때, 양적 가치의 세상에서 질적 가치를 고집함으로써 그 존재를 실체로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물론 연극의 시대에서 영상의 시대로 바뀌면서 연기의 방식도 다양해졌다. 메서드 연기가 국룰로 여겨지던 시대는 연극의 시대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극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 배우들에게 메서드 연기는 당연했다. 하지만 매번 찍은 걸 모니터로 확인해 가며 보다 효과적인 연기를 찾아나가는 요즘 같은 영상의 시대에 연기는 본인이 빠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효과도 중요하게 됐다. 김명민 스스로도 최근 들어 너무 지나치게 메서드를 고집하는 것이 대중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다며 이를 덜어내는 연기를 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연인'의 남궁민

메스드 연기든 그렇지 않든 배우들의 연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는 이미 스타로서의 삶을 욕망하도록 강요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끝없이 수치로서 환산되는 자신의 양적 가치를 높여나감으로써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인플루언서, 유튜버의 시대가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어느새 물질적 욕망으로서 우리 속에 들어와 있다. 이것이 생존이기에 우리는 경쟁을 해야 하고, 누군가 스타가 될 때, 누군가는 낙오되어 그 위를 부러움의 시선으로 올려다봐야 한다. 낙오되면서도 그 시스템을 탓하지 않고 자신을 탓하며 오히려 자신을 밟고 성공한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스타라는 존재를 통해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교육시켜 온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스타는 허상이다. 그래서 그 존재는 좀체 변신하려 하지 않는다. 스타로 만들어준 그 신적 이미지를 왜 스스로 부수려 하겠는가. 그들은 스타로 군림하며 가짜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지우는 짐 또한 혹독하다. 실체를 잃어버린 삶이나, 실제와 가상을 혼돈하는 삶은 늘 파탄으로 우리를 내몰기 마련이다. 하지만 배우들은 다르다. 스타가 가진 고정된 가짜의 신적 이미지는 배우라는 무한히 변신을 해야 하는, 그럼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거꾸로 부담으로만 작용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변신함으로써 그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찾아나간다. 


우리는 각자의 삶이라는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들이다. 우리는 그 위에서 새로운 삶, 새로운 인생을 꿈꾼다. 스타라는 자본주의가 마련한 시스템 위의 허상을 좇을 것인지, 아니면 배우라는 본연의 실존을 좇을 것인지는 모두 우리의 선택에 달린 문제다. 흔히 가십 정도로 치부하며 입에 오르내리는 스타 혹은 배우. 이 두 존재가 우리네 삶에 던져주는 질문은 이처럼 의미심장하다.

2024.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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