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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덕현 Nov 12. 2024

웃음의 원리는 줄타기와 같다

- 줄광대를 통해 보는 웃음의 원리

웃음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자주 남사당패의 '줄타기'를 예로 들곤 했다. 그건 어느 볕 좋은 봄날, 일산 호수공원을 걷다가 잔디밭 한 편에서 펼쳐지고 있는 줄광대의 한 판 놀음을 너무나 충격적으로 본 경험 덕분이다. 그 경험을 나는 자주 인용해 한국의 문화를 설명하는데 써먹었다. 이를 테면 'K콘텐츠 속 한국 전통문화의 자양분' 같은 글이 그것이다. 그 글에서 줄광대에 대해 묘사한 글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줄광대는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고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연출했다. 그때마다 그 광경을 보던 관객들은 탄성을 자아내고 깔깔 웃으며 박수를 쳤다. 줄광대는 줄타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줄 밑에서 매호씨가 해주는 장구 연주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췄고, 매호씨와 재담을 주고받으며 관객들을 웃게 만들었다. 관객과의 직접적인 소통도 빠지지 않았다. 어려서 마을 공터에 판을 벌여놓고 남사당패들이 보여주던 공연들 중에서도 내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건 바로 이 줄타기였다. 세상에 이렇게 버라이어티 한 재미를 주는 공연이 있을까!"  - 'K콘텐츠 속 한국 전통문화의 자양분' 중에서 
왕의 남자

줄광대를 보며 웃음의 원리를 떠올리게 된 건, 그 아슬아슬함이 우리에게 웃음으로 바뀌는 걸 그들이 너무나 잘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사당패의 줄타기는 그 놀라움을 과시하곤 하는 서구의 줄타기와는 사뭇 달랐다. 나이아가라 폭포 사이에 줄을 이어 놓고 긴 장대 하나를 들고 그 줄 위를 걸어가는 서구의 줄타기는 한 마디로 스펙터클이다. 그것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이렇다. '놀랍지 않은가!' 하지만 남사당패의 줄타기는 이것과는 완전히 결이 다르다. 일단 3미터 눈높이에 세워진 줄 자체가 스펙터클을 지향할 수는 없는 구조다. 대신 줄광대는 그 낮은 높이기 때문에 가능해진 관객들과의 소통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줄 위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재담으로 폭소를 유발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슬아슬한 줄타기 역시 놀라움보다는 '재미짐'을 추구한다. 줄광대는 이미 줄 위에서 갖가지 기예를 보이는 게 능숙하지만, 능숙한 티를 내지 않는다. 대신 쓰러지고 떨어질 것처럼 연기를 하고 하다못해 엉덩이로 줄을 차고 하늘로 뛰어오르는 보기에도 시원시원한 기예를 펼치고 나서도 엉덩이가 얼얼하다는 너스레를 떤다.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고 아찔하게 튀어 오르고 잘 착지해 놓고도 아프다며 엄살을 떠는 모습은 그래서 관객들을 안도하게 하고 결국은 웃게 만든다. 극도의 긴장감을 유발한 후 이를 이완시킴으로써 만들어지는 웃음이 그것이다.


줄광대가 보여주는 이 웃음의 원리는 정확하게 찰리 채플린이 무성영화 시절 보여줬던 슬랩스틱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모던 타임즈'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백화점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2층 난간에 올라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공사 중이라 차단막이 사라진 그곳에서 채플린은 뒤로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롤러스케이트를 탄다. 그 장면을 보던 여자가 너무나 아찔한 표정을 짓지만 관객들은 이 장면에서 웃음이 터진다. 아슬아슬하지만 떨어지지는 않는 그 상황 속에서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면서 웃음이 터지는 것이다. 

모던 타임즈

이 긴장과 이완을 여러 상황에 집어넣어도 웃음은 생겨난다. 예를 들어 자그마한 체구의 채플린이 거구의 사내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의도치 않게 상대를 때리는 장면에서 유발되는 웃음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두들겨 맞을 것 같던 긴장감은 채플린이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오히려 반격을 하는 반전을 통해 안도의 웃음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러한 슬랩스틱 코미디를 바탕으로 했던 '웃으면 복이 와요'나 '유머 일번지'는 물론이고 '개그콘서트' 초창기 시절까지만 해도 웃음의 법칙은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고 전복하는 과정을 통해 자주 재연되었다. 배삼룡, 서영춘, 이주일 선생님의 코미디가 그랬고, 영구(심형래), 맹구(이창훈), 오서방(오재미)의 코미디가 그랬다. 또 이러한 슬랩스틱류의 몸 개그가 아니라 80년대 버라이어티쇼가 등장하면서 생겨난 말 개그에서도 이 웃음의 법칙은 크게 다르지 않다. 주병진과 이경규 그리고 노사연이 맹활약했던 '일요일 일요일 밤에' 같은 프로그램에서 주병진이 다소 웃음기 사라진 엄숙한 분위기로 진행을 하면 엉뚱한 말로 그 긴장감을 파고 들어오는 이경규와 노사연의 말들이 웃음을 줬기 때문이다. 


남사당패 줄타기가 갖고 있는 기예를 활용한 웃음은 '개그콘서트' 시절에도 힘을 발휘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김병만의 '달인' 코너였다. 처음에는 허세로 웃음을 주던 '달인'은 갈수록 줄광대가 하듯이 진짜 기예를 아슬아슬하게 보여주는 반전으로 웃음을 줬다. 논버벌 퍼포먼스로 전 세계적인 각광을 받은 옹알스는 저글링 같은 기예를 통해 이를 재연했다. 그 후에도 긴장과 이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웃음의 법칙은 '무한도전'과 '1박2일'이 이끌었던 리얼 버라이어티 시절에서도 이른바 '생고생'을 꺼내 긴장을 유발하고 적절히 그걸 풀어주는 방식으로 힘을 발휘했고, 현재의 리얼리티쇼 시절에도 여전히 활용되고 있다. 물론 최근에는 예능 프로그램들이 웃음만이 아니라 보다 포괄적인 재미로 확장되었지만, 거기서도 적당한 긴장감과 그걸 풀어주는 이완 사이의 균형이 중요해졌다. 

옹알스

몇 년 전 메타 코미디 클럽의 정영준 대표와 행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에게 웃음이 도대체 뭐냐는 우문을 던진 적이 있다. 그때 그의 답변은 실로 놀랍고도 아슬아슬한 것이었다. "금기를 넘나드는 것"이라고 얘기했던 거였다. 그 말은 다소 과격하게 들렸지만 틀린 건 아니었다. 안전한 선 안에서는 아무런 긴장감이 생겨나지 않는 게 상식이다. 그러니 선을 넘나들며 긴장을 유발하는 지점이 아니면 어찌 웃음이 생겨날 수 있을까. 다만 그 선을 너무 넘어서면 웃음이 아닌 불편함이 커지게 되고 그래서 재미가 아닌 불쾌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이 금기를 넘으면서도 그 긴장감이 이완될 수 있게 해주는 안전한 착지를 위한 균형감각은 이런 웃음에도 필수가 됐다. 줄광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줄 위에서 하늘로 차고 오르며 그 안전함의 금기를 넘어서지만 다시금 줄 위로 착지해야 사람들은 웃을 수 있는 법이다. 땅에 떨어지면 '살 판'이 아니라 '죽을 판'이 될 테니 말이다. 메타 코미디의 피식대학 같은 코너들이 빵빵 터지는 웃음을 주다가도 때때로 논란에 휩싸이는 건 바로 이 줄타기를 잘못해 튕겨져 나감으로써 생겨나는 일이다. 


최근에 나영석 PD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가 자꾸 방송에 얼굴을 내밀더니 이제는 660만이 넘는 구독자를 확보한 인플루언서로까지 활동하게 된 사연을 들었는데 거기서도 나는 또다시 줄광대를 떠올렸다. 그가 방송에 얼굴을 내민 건 이제 막 리얼리티로 들어오기 시작한 그 시절에 그들이 하는 여행과 복불복이 진짜 리얼 상황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차츰 방송에 얼굴을 내밀던 그는 또 한 명의 출연자처럼 기능하기 시작했는데, 그것 역시 방송의 긴장과 이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예를 들어 '꽃보다 할배'에서 어르신들이 여행하는데 이서진 같은 인물이 하인 역할로 투입된 건, 아무래도 생고생일 수 있는 그 여행이 주는 불편함(긴장감)을 풀어주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 나영석 PD 또한 들어가 고단한 하루를 보낸 이서진의 푸념을 들어주는 장면이 들어가게 된 건, 자칫 이서진에 쏠린 하중이 주는 불편함 또한 풀어주기 위함이었다는 것. 나영석 PD는 방송이 일종의 '간 맞추기'와 다를 바 없다며, 출연자들이 너무 힘들어 긴장감이 높아지면 이것을 풀어주기 위한 여러 방법들을 동원하는데, 나영석 PD가 그 여행에 개입하는 건 그래서라고 했다. 긴장과 이완 사이의 간 맞추기. 줄타기와 뭐가 다른가. 

꽃보다 할배

최근 들어 웃으려 한 시도가 불편함이 되어 논란이 되는 사례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 본질은 이 긴장과 이완 사이에서 균형을 놓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감수성이나 정서도 영향을 미친다. 과거 바보 개그는 가장 웃기는 코드였지만 지금처럼 다양성의 시대에 그건 비하와 조롱으로 받아들여져 결코 이완되지 않는 긴장만을 남기는 소재가 됐다. 얼굴 비하 개그도 마찬가지다. 이주일 선생님이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라는 말로 전국을 뒤집어놓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그런 말은 다양성과 개성이 중요해진 시대에 공감하기 어려운 말이 됐다. 웃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변하지 않는 감수성과 정서도 있다. 이를 테면 당할 것 같던 약자가 강자를 대적해 이김으로써 생겨나는 긴장과 이완은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웃음의 법칙이다. 자그마한 체구의 채플린이 거구의 남자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의도치 않게 때리는 장면은 그때도 웃겼지만 지금도 우습다. 반면 거구의 남자가 작은 체구의 채플린을 때리면 그건 웃음이 아닌 비극이 되는 것도 달라지지 않은 정서다. 풍자가 권력자 같은 강자를 대상으로 할 때는 웃음을 주지만, 힘없는 서민이나 그들을 대변해 온 약자를 대상으로 하면 불쾌감만 준다. 


웃음의 기원 중 하나는 무서운 숲을 지나가다 마주하게 된 상대를 보고 자신은 적이 아니라 친구라는 걸 드러내기 위해 이빨을 드러냈던 그 기제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있다. 그 오래된 원시 시대부터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감이 주는 긴장이 툭 풀어질 때의 그 웃음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매년 고향인 안성에서 열리는 바우덕이 축제에 가면 종종 줄광대들의 줄타기 공연을 볼 수 있다. 매번 크게 다르지 않은 레퍼토리지만 볼 때마다 빵빵 터지는 웃음을 어쩔 수가 없다. 그건 어쩌면 그것이 우리의 본질에 닿아 있는 웃음을 계속 건드리기 때문이 아닐까. 줄타기를 볼 때마다 나는 웃음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건 또한 어떤 선을 넘어서야 비로소 새로운 재미를 얻게 되고, 그러면서도 안전하게 선으로 되돌아와야 그 재미가 온전해지는 우리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여러분의 삶이 긴장과 이완의 적절한 균형을 잡아가기를... 

2024.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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