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을 벗어던지자마자 고향 탈출을 성공했다! 쾌재를 부른 것도 잠시, 부모의 품을 벗어난 새끼는 마주한 현실에 좌절을 맛보고 말았다. 자유는 밀크 초콜릿일 줄 알았는데 카카오 99%였다. 꽤 내향적인 나는 20살을 고독과 자기 연민을 안주 삼아 혼자 술에 취해 보냈으며, 큰 고민 없이 선택한 전공 공부는 손에 잡힐 리가 만무했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탈출기지만 단편으로 끝내기엔 아쉬웠다. 도시 생활에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오기도 발동했다. 결국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그 도시에서 쭉 살았다. 그동안은 손에 꼽을 정도지만 여전히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소중한 친구들도 생겼고, 무엇보다 내 취향과 삶의 방향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사춘기를 20살 넘어서야 겪은 것 같았다.
석사모를 벗어던지자마자 이번엔 외국으로 떠났다. 하루 정도 굶고 스트레칭 열심히 하면 내가 들어갈 수도 있을 거 같은 캐리어에 10개월치 짐을 담았다. 중간에 코로나가 터져 귀국할 뻔했지만, 이번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10개월 후에는 다시 그 나라로 파견되는 자리에 지원해 2년을 더 살다가 왔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밥벌이는 쉽지 않았고, 2년간의 파견 기간을 다 마쳤을 때 나는 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20여 년 동안 내 안에서 항상 넘실댔던 감성이나 바람, 여유로운 마음이 모두 빠져나간 상태였던 거 같다. 다른 생각할 거 없이 나는 일단 고향으로 가기로 했다. 오랜 떠돌이 삶의 결과로 어느 정도 미니멀리스트가 된 나는 19살 겨울, 그곳을 떠나올 때보다 짐이 적었다.
지난 10년 동안 내가 '집'이라고 불렀던 임시 거처가 아닌 진짜 집에 왔다. 그런데 말이다. 우리 가족은 내가 대학을 졸업할 즈음 나 빼고 이사를 했다. 그래서 집에 내 방이 애초에 없다. 여동생이 시집가서 빈 방이 된 곳에 일단 짐을 풀었다. 내가 산 가구, 물건은 하나도 없는 곳이다. 침대에 누워 매일 자긴 했지만 어색하고 불편했다. 10년 간 전전하던 임시 거처들의 처음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오랜 기간 살 부대끼며 살지 않아 생긴 가족 간의 애틋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오히려 매일 긴장감이 감돌았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부모님의 살림과 생활 습관에 참견을 시작했다. 이건 왜 여기에 뒀어? 저건 왜 버리지 않는 거야?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건들지 마. 이 말들로 시작된 크고 작은 갈등들 가운데 '잠깐 머무를 거야.'라는 생각은 체념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여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의 취향을 충족시키는 것들과 가고 싶은 곳은 모두 여기에 없다고. 무엇보다 앞으로 밥벌이를 해야 할 텐데 여기는 일할 곳이 없으니 이곳에 오래 살 수 없다고. 그래서 여기에 잠시 머무르는 거라고. 이렇게 솔직하게 계획을 말하면 부모님과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긍정했다. 지난 10년 간의 내 행보가 그러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이곳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