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텔 식당에 원형 식탁이 있으면 벌어지는 일
이웃과 인사는커녕 옆 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는 무관심의 시대. 사람들은 유독 호스텔에선 타인에게 쉽게 마음을 엽니다.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고, 같이 놀러도 나갑니다. 발음도 제대로 하기 힘든 이국의 이름을 몇 번이나 연습을 해가면서 익혀갑니다. 어차피 며칠 보지 않을 사람이어서 일까요. 아니면 여행지가 주는 설렘이 타고난 사회성에도 영향을 주는 것일까요. 이상하게 호스텔에선 모두가 친구고 모두가 가족이 됩니다.
제가 현재 근무하고 있는 이 숙소에선 더 심상치 않습니다. 이곳이 대놓고 ‘사교’를 컨셉으로 내세우는 파티 호스텔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바(Bar)가 있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손님들끼리 교류가 굉장히 활발합니다. 술 한 방울 없이, 심지어 눈 뜬 지 얼마 안 되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서로 말을 섞기 시작합니다.
저는 처음에는 그 모든 게 친화력 좋은 직원들의 노력 덕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거의 매일 밤 다 같이 모일 수 있는 이벤트를 열고, 항상 손님들에게 먼저 말을 걸며 다가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제가 일주일 넘게 관찰을 해보니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이곳엔 다른 호스텔에는 없는, 모든 이를 휴대폰에서 눈을 떼게 만들고 대화를 시작하게 하는 비밀이 숨어있었습니다. 바로 ‘원형 식탁’입니다.
안락한 소파와 티비가 있는 거실 외에, 여기엔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있습니다. 조식을 제공하는 식당이자 다양한 액티비티가 열리는 모임의 장소이지요. 다른 숙소에서는 보통 2-4인용 사각형 식탁 여러 개를 흩어 놓습니다. 공간이 협소하면 벽에다가 테이블을 붙여 더 많은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 식당은 특이하게 15명은 거뜬히 소화할 수 있는 커다란 원형 식탁이 중앙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타원형도 아니고 정말 동그란 테이블입니다. 놓을 수 있는 의자 개수에 비해 공간 차지를 많이 하지요. 면적 효율은 사각형보다 떨어지는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둥근 탁자는 이 모든 단점을 잠재울 놀라운 기능을 갖고 있었습니다.
원형 식탁 어디에 붙어 있는 의자를 선택하든 간에, 사람이 일단 앉기만 하면 같은 테이블에 있는 이들의 얼굴을 다 볼 수 있습니다. 고개만 들면 누군가와는 눈이 마주치기 때문에 모두가 간단한 눈인사라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다들 빙 둘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자신의 양 옆에는 항상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옆 사람과 거리가 그렇게 부담스럽진 않습니다. 사각처럼 일렬로 나란히 붙어 앉은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정말 기가 막히게,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에 딱 적절한 만큼 공간이 유지됩니다.
이미 자기들끼리 단단한 결합력을 가진 단체 손님이 와도 이 둥근 테이블 앞에서는 그 힘을 잃습니다. 단짝 커플 혹은 세네 명의 절친들도 그들만의 세계를 형성할 수 없습니다. 모두 다 둘러앉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선 홀로 온 손님이 소외되거나 어색함을 느끼기 힘듭니다. 둥글게 모여 있으면 누가 혼자 왔고 누가 서로 친구 사이인지 알아보기조차 어렵습니다. 네모 식탁이 배열된 식당과는 달리 큰 원형 식탁 하나만 있는 곳에선 사람들은 어디 앉아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느 자리든 똑같으니까요. 모르는 사람 바로 옆 자리에 앉는 불편함, 마지막 남은 한 자리를 차지할 때 느끼는 민망함도 이곳에선 찾아볼 수 없습니다.
원형 식탁에서는 서로 말을 안 하고 자기 휴대폰만 쳐다보는 게 더 힘들 겁니다. 조식을 먹기 위해 눈도 제대로 못 뜨고 부스스한 모습으로 식당에 나타난 사람들도 이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이들과 금세 동화됩니다. 착석하자마자 시선이 다 집중되기 때문이지요. 손님들은 ‘굿모닝’ 안부인사와 더불어 어제는 뭘 했는지, 오늘은 뭘 할 건지 서로의 일정을 물어봅니다. 사실 관광객들이 가는 코스는 거기서 거깁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이 너도 가고 싶은 곳일 게 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루 계획을 묻다가 동행을 하게 됩니다. 저도 그렇게 아침밥을 먹다 갑작스레 처음 보는 옆 사람과 같이 놀러 가게 된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둥글게 모여 앉으면 그 자리에서 나누는 모든 대화가 사람들의 귀에 들어옵니다. 관심 있는 대화 소재나 흥미로운 관광 정보가 어디선가 오가는 게 들리면 자연스레 끼어들기 쉽습니다. 굳이 자신의 양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도 눈을 바라보며 얘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정 반대편 사람과도 마찬가집니다. 어색한 순간에 휴대폰 화면으로 도망치게 할 요소가 원형 식탁에선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익명성 제로, 마력의 공간이지요.
애초에 호스텔 사장이 이 테이블의 사교적 마력을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저 대형 원이 주는 공간의 미를 강조하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이 물건 하나가 이곳을 한번 찾은 사람이 계속 숙박 연장을 하게 만드는 마법을 부리고 있습니다. 한번 아침만 먹었다 하면 사람들은 손님들끼리는 물론 직원들과도 금세 친해집니다. 리셉션을 찾아와 며칠 더 묵고 가겠다고 계획을 바꾸는 이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사람들과 분위기가 좋아서 더 있다 가야겠다고요. 체크아웃을 하고 숙소를 떠나는 순간에는 진심을 담아 제게 감사를 표현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좋은 시간 만들어 줘서 고맙다, 정말 재밌는 추억 많이 만들고 간다면서요. 사실은 그들이 감사를 해야 할 데는 따로 있는데 말입니다. 바로 원형 식탁이지요.
이젠 세계 어딜 가나 음식점에서 사람들이 말없이 테이블에 앉아 서로 휴대폰을 보며 음식을 기다립니다. 심지어 집에서 가족 모임, 단 둘의 식사 자리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음식이 나왔는데도 대화를 하기는커녕 휴대폰 화면과 함께 밥을 먹습니다. 저는 감히 세상의 모든 식탁이 원형으로 바뀌는 상상을 해봅니다. 이 호스텔에서 벌어지는 마법이 온 세상에 퍼져 사람들을 다시 끈끈히 이어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