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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Oct 28. 2022

호스텔 남녀 공용 도미토리, 우려했던 일이 터지다

여성 홀로 여행객이 꼭 '여성 전용' 도미토리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

호스텔엔 개인실 외에도 배낭여행객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한 방이 있습니다. 한 방에 이층 침대 여러 개를 두고 다른 손님과 함께 쓰는 ‘도미토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요즘 도미토리가 제아무리 사생활 보호용 가림막을 갖고 있다고 해도 불변의 진실이 있습니다. 호스텔에서 가장 빨리 나가는 방은 항상 ‘여성용 도미토리’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일반 남녀공용보다 가격이 더 비싼데도 먼저 예약이 찹니다.



일차적인 이유로는 생활의 불편함을 들 수 있습니다. 일단 여성분들이 방 안에서 자유롭게 옷을 갈아입기 힘듭니다. 게다가 코를 심하게 골거나 남에게 피해를 줄 정도로 청결에 무심한 남성 여행객들이 꽤나 많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혹시나 모를 불미스러운 사건의 가능성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지요. 안타깝게도 여전히 여성 여행객들은 ‘안전’을 위해 돈을 더 지불합니다.



그리고, 그게 결코 과도한 우려가 아니라는 사실을 멕시코에서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호스텔 손님들이 하나둘씩 잠자리에 들기 시작하는 밤 열 시. 동료 모두 거실에 모여 앉아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영화에 조예가 깊은 친구가 고른 작품 시청에 한껏 빠져 있었다. 여러 시공간을 넘나드는 스토리에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해 서로 틈틈이 질문을 주고받으며 영화를 봤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거실에 또 다른 누군가가 우리와 함께 머물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한 여자 손님이 티브이의 왼편에 놓인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 영화에 몰입해 있던 터라 언제부터 그녀가 거기에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우리처럼 티브이를 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우리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입만 벙긋거리며 신호를 나눴다.


‘저 여자애 언제부터 있었어?’


‘영화도 안 보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그러다 우리는 그녀에게 관심을 거두고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쉴 새 없이 빠르게 전개되는 이야기에 말 그대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화에 넋을 놓고 있었다. 엔딩마저 예사롭지 않아서 우리는 티브이가 까만 화면으로 뒤덮였는데도 엔딩의 의미와 줄거리에 대해 침 튀기게 논의했다. 그때 시간은 이미 열한 시 반을 훌쩍 넘긴 상태였다. 근무를 서고 있던 동료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숙소 마감을 하러 떠났다. 나머지도 주변 정리를 돕다 슬슬 방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이 꿈쩍하지 않았다. 있는 듯 없는 듯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금발 소녀는 우리의 분주한 움직임 속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열 두시 전에는 건물 전체 소등을 할뿐더러 손님이든 직원이든 모두 자기 방으로 되돌아가야 하기에 우리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희 곧 불 다 끄고 문도 잠글 거라서 방으로 돌아가셔야 해요.’


보통은 이렇게 손님에게 숙소 마감 안내를 하면 다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서둘러 자리를 뜬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뭔가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게 눈빛에서, 그리고 둥글게 말아 앉은 자세에서 느껴졌다.


저, 오늘 여기 소파에서 자면 안 될까요?


멀쩡한 침대를 두고 소파에서 잠을 자다니 이게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인가. 더군다나 그녀가 묵는 방은 이층 침대도 아니라 싱글 침대가 가림 ‘벽’을 두고 놓인 나름 고급진 도미토리였다. 그것도 기본 여섯에서 여덟 명이서 공유하는 다른 객실과는 달리 방에 침대가 3개밖에 없었다. 그 전까진 몰랐다. ‘프리미엄’이 누군가에겐, 특히나 여성에겐 ‘기본’ 보다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당황도 잠시, 대체 무슨 일이냐며 소녀 주변에 둘러앉았다. 한밤중에 자기 방에서 자지 않겠다는 손님, 무언 가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불… 불편해요. 그 방에서 못 자겠어요.’


손님과 직원의 관계는 둘째 치고, 홀로 여행하는 여자 여행객이란 이름 아래 우리는 순식간에 똘똘 뭉쳤다. 뭐 때문에 불편하냐, 벌레가 나왔냐, 방에 같이 가보자 등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자 그녀는 더 당황하고 초조해했다.


‘사실, 같은 방에 있는 다른 손님 때문에… 아 절대로 그 남자한테는 아무 말하면 안 돼요. 부탁이에요. 그 남자가 본인 때문에 제가 방에 안 가겠다고 하는 거… 몰랐으면 좋겠어요.’






그랬다. 침대가 단 3개밖에 놓이지 않은 방에 그날 투숙객은 2명. 그녀와 어느 남성. 단 둘이었다. 그 남자는 내가 낮에 체크인을 시켰다. 그는 인터넷이나 전화로 사전 예약을 하지 않고 무작정 들이닥친 손님이었다. 그가 노숙자처럼 행색이 추레하거나 냄새가 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내 본능이 이상을 감지했다.


‘뭔가 기운이 이상하다.’


그렇다고 일개 직원, 그것도 정식 직원도 아닌 volunteer(숙식 제공을 대가로 인력을 제공하는 여행자)인 내가 내 느낌이 별로라는 이유라는 이유로 그를 내쫓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멀쩡히 빈 방이 남아 있는데도 말이다. 찜찜한 마음을 안고 나는 그를 위해 체크인 절차를 진행했다. 그에게 침대를 배정할 때는 그래도 내 나름대로 신경을 썼다. 여성 투숙객 한 명이 머물고 있는 방에 그를 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혹시나’하는 마음에 그녀의 자리와 빈 침대 하나를 사이에 둔 데다 반대편 벽을 바라보는 침대에 그를 배정했다. 하지만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그날 밤, 나의 그 작은 노력이 아무 쓸모가 없었다는 게 밝혀진 것이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인 데다 당장 휴식이 필요해 보이는 그녀의 낯빛에 우리는 그녀에게 더 이상 자세한 자초지종을 캐묻지 않았다. 특정 남성 투숙객과 같은 방에 있기 싫다는 말과 한없이 흔들리는 그녀의 목소리와 눈빛, 그 모든 게 어떤 류의 사건임을 짐작케 하는 데 충분했다. 우리는 그 어떤 망설임 없이 매니저에게 그녀의 침대를 다른 방으로 옮긴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다행히도 여성 2명이 머물고 있는 다른 도미토리에 침대가 하나 남아 있었다. 우리와 함께 새로운 방으로 향하면서도 그녀는 끊임없이 단 한 가지만 걱정했다. 다름 아닌, 그 남자의 귀에 이 사실이 들어가는 것을. 그의 추잡한 행실이 드러났다는 것을 안 그가 그녀에게 ‘보복’할까 두려운 그 마음, 슬프지만 같은 여성으로서 충분히 공감이 갔다.



날이 밝고 매니저가 아침 일찍 부리나케 호스텔로 달려왔다. 자신의 숙소에서 성추행 사건이 벌어졌는데 호스텔 주인이기도 한 매니저가 느긋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든든한 지원군을 곁에 두고 조금이나마 두려움을 털어낸 듯한 그녀는 아침이 되자 스스로 입을 열었다.


...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



Photo by Marcus Lok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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