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조용했던 뒤처리
(이전 1편 내용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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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고 매니저가 아침 일찍 부리나케 호스텔로 달려왔다. 자신의 숙소에서 성추행 사건이 벌어졌는데 호스텔 주인이기도 한 매니저가 느긋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든든한 지원군을 곁에 두고 조금이나마 두려움을 털어낸 듯한 그녀는 아침이 되자 스스로 입을 열었다.
"그가 제 침대에 다가와 말을 걸었어요. 늦은 밤에, 가림벽을 넘어서까지 찾아와 말을 붙이는 게 전 너무 부담스러웠어요. 그래도 같은 방에 머무는 사람이니 매몰차게 무시하진 못했어요. 그냥 그의 말에 별 호응을 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그가 은근슬쩍 제 침대에 앉았어요. 대뜸 마사지를 해주겠다는 거예요. 제 팔을 쓰다듬었어요. 그리고 다리도. 저는 싫다고 불쾌감을 표현했지만 소용없었어요. 그는 계속해서 마사지를 해주겠다고 다가왔어요. 그래서 제가 거실로 도망갔던 거예요."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을 말로 들으니 더 기가 막혔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마사지랍시고 찝쩍거릴 생각을, 그것도 돈 없는 여행자들의 소중한 쉼터 호스텔에서 말이다. 애초에 그가 그런 못돼 먹은 목적으로 일부로 호스텔 도미토리를 골랐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체크인 당시 그가 직접 내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고향이 이곳 와하까라고. 다른 멕시코 지역을 몇 년간 여행하다 오랜만에 고향에 들렀다고. 나고 자란 도시에 며칠 묵을 가족 혹은 지인이 없다? 특별한 사연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더군다나 현지인이 사전 예약을 거치지 않고 숙소로 직접 방문해 그날의 방을 찾는 것은 또 다른 가능성을 암시한다. 부킹닷컴, 호스텔월드 같은 숙소 예약사이트에서 본인의 계정을 계속 사용할 수 없을 정도의 사건사고를, 이미 다른 숙박업체에서 저지른 경우다. 실제로 그간 여러 매니저들의 말을 들어봤을 때 당일 숙소로 찾아와 방을 잡는 현지인들이 불미스러운 사건을 저지르는 게 대부분이라고 한다. 내 경험상도 그랬다. (이전 글 '한밤중 호스텔 손님이 혈투를 벌인 이유' 참조)
그녀가 우리에게 한창 이야기를 털어놓던 중 그녀는 갑자기 경기를 일으키듯 눈알이 커지고 몸을 떨었다. 무언가에 소스라치게 놀란 게 틀림없었다. 나는 바로 그녀가 바라보던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유유히 걸어가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성추행범이었다. 그 광경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과 동시에 내 안에서 더 큰 분노가 끓어올랐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먼발치에서만 봐도 벌벌 떨고 있는데, 정작 가해자는 아무렇지 않게 숙소를 휘젓고 다니고 있다니.
사건에 대한 매니저의 대처도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매니저가 취한 ‘조치’는 아주 조용했다. 그는 경찰에 신고를 하기는커녕 그 남자에게 윽박지르거나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지도 않았다. 그 남자가 어느 방, 어느 침대에 묵는걸 뻔히 알면서도 찾아가지 않았다. 언제 리셉션을 지나가나 관찰만 했다. 마침내 그 남성이 걸어가는 걸 보자 조용히 리셉션 뒤로 그를 불러 세웠다. 주변에서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던 걸로 보아 매니저는 누가 들을까 무서워 속삭인 게 틀림없었다. 세상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떠나, 그 남성의 범죄 중대성을 떠나, 호스텔의 주인이자 매니저인 그에게 중요했던 건 숙소의 ‘평판’이었으리라. 그렇게 성추행범은 아무도 모르게 짐을 싸서 호스텔을 떠났다. 매니저가 우리에게 전달한 지시는 참 간단했다. ‘그 소녀에게 남자가 더 이상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전하라.’
그렇다고 나는 그 소녀에게 왜 사건을 덮으려 하냐고, 그 남자가 마땅히 죗값을 치르게 하자고 부추길 수도 없었다. 한국에서 비슷한 일을 몇 차례 겪어본 나로서 그녀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사건을 바라보는 제삼자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당시 상황의 끔찍함과 그 더럽고 무서운 기분을 누가 감히 나눠 가질 수 있겠는가. 미투 사건 이후로 사회의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고들 하나 여전히 수많은 여성들이 성범죄를 당하고서도 주변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고 가해자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게 사실이다.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뿐 아니라 금발의 서양 소녀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머리로는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고 어떤 것이 옳은 행동인지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자신이 성범죄를 당하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태. 사건 바로 다음 날, 그녀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조용히 떠났다. 그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성별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예약할 수 있는 도미토리가 확실히 쌉니다. 게다가 여성 전용 방은 공급은 적고 수요가 많은 만큼 좋은 시설과 적당한 가격을 모두 만족시키는 곳을 찾기 어렵습니다. 저 역시 한 푼 한 푼이 아쉬운 가난한 배낭여행객이지만 감히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두 끼를 굶는 한이 있더라도 여성 전용 도미토리나 개인실을 가시라고요. 영 주머니 사정이 안 좋으면 아예 한 방에 머무는 인원이 ‘지나치게’ 많은 곳을 가는 것도 방법입니다. 냄새와 소음에 시달리는 게 차라리 마음도 편하고 안전합니다.
[참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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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Marcus Loke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