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이었습니다. 당시 꽤 열심히 영어 공부를 했습니다. 그때 영어 교재가 미국 대통령 선거 TV 토론회였습니다. 미 최고 정치인들이 구사하는 고급 영어를 익히겠다는 욕심이었습니다.
대통령 선거에선 재선에 도전하는 민주당의 빌 클린턴 후보와 공화당의 밥 돌 후보가 맞붙었습니다. 오래 전이라 토론회 내용은 대부분 까먹었습니다. 딱 하나만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사회자는 토론을 시작하면서 양쪽 후보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큰 정부를 지향합니까?, 아니면 작은 정부를 지향합니까?"
민주당의 빌 클린턴 후보는 큰 정부, 공화당의 밥 돌 후보는 작은 정부라고 답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명쾌합니다. 딱 하나의 질문으로 후보와 소속 정당의 성격을 확실하게 규정했습니다. 미국의 양당 정치 체제는 100년 이상을 버티며 현대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꼽힙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으로 뿌리가 살짝 흔들려도 어쨌든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눈을 돌려 영국으로 가보겠습니다. 정당 정치의 원조인 영국은 보수당과 노동당이 굳건합니다. 영국은 당명에서 당의 색깔이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애초 영국은 보수당의 전신인 토리당과 휘그당이 17세기부터 활동했습니다. 1832년 선거법 개정으로 토리당은 보수당, 휘그당은 자유당으로 발전했습니다. 노동 계급이 성장하면서 1906년 노동당이 결성되고, 1차 대전 이후 보수당과 노동당의 양당 체제가 영국을 이끌고 있습니다.
미국과 영국의 정당 정치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거목처럼 뿌리를 단단히 내렸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로 시선을 돌려보겠습니다. 현대 정당 정치를 보기 전에 조선시대부터 먼저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조선시대는 붕당 정치가 꽃을 피운 시기입니다. 요즘 방식으로 말하면 K-민주주의가 자체적으로 가동되고 있었습니다. 붕당은 정파적, 학파적 성격으로 당을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익히 알려진 동인, 서인, 남인, 노론, 소론 등이 해당됩니다.
붕당 정치 체제의 이상은 좋았지만 현대에는 부작용만 기억됩니다. 흔히 당파 싸움으로 알려진 치열한 대립을 말합니다. 심지어 당파 싸움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소리도 나옵니다. 물론 이 부분은 제국주의 일본이 지나치게 왜곡해서 부풀렸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습니다.
현대로 넘어오면 어지럽습니다. 수많은 정당이 등장했다가 바람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대한민국만큼 많은 정당이 만들어진 나라도 드물 정도입니다.
이런 가정을 해 봅시다. 100년 후 대한민국의 건국과 경제 성장, 민주주의 발전을 학생들에게 교육한다고 생각하면 참 뿌듯합니다. 우리나라만큼 드라마틱하게 발전한 나라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딱 한 부분이 걸립니다. 바로 정치입니다. 그중 정당의 역사는 한마디로 혼돈 그 자체입니다. 수많은 정당이 등장과 사라지기를 반복했습니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100년 후의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난수표에 가까울 정도로 복잡할 겁니다.
만약 정당사가 시험 문제로 나온다면? 그냥 포기하는 게 나을 겁니다. 그 정도로 복잡합니다.
장황하게 정당 이야기를 꺼낸 건 국민의힘이 12일 당명을 교체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2020년 9월 야심차게 내걸었던 국민의힘 간판이 6년도 안 돼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국민의힘이 홈페이지에 게시한 당 연혁의 시작점인 한나라당 당명을 기준으로 하면 새누리당·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국민의힘에 이어 5번째 당 '간판' 교체입니다. 한나라당 출범이 1997년 11월입니다. 30년도 안 되는 시간에 당명이 5번 바뀌었습니다.
국민의힘이 특별한 케이스가 아닙니다. 우리나라 보수 진영 전체를 살펴보면 당명은 더욱 복잡합니다. 새로운 당명 작명이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이름이 명멸했습니다. 그래서 과연 어떤 이름이 국민의힘을 대신할지 관심이 모입니다.
진보 진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당명에 '민주'가 들어간 정당만 해도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진보 진영 역시 워낙 많은 간판을 교체했습니다. 보수 진영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당명을 짓는다면 꽤나 고심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자주 당의 이름을 바꿀까요? 대체적으로 위기 돌파를 위한 승부수로 당명을 바꿨다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쇄신을 위해 당명을 개정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위기에 봉착하면 쇄신을 명분으로 당명을 바꿀 가능성이 높습니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정당 정치에 대입하면 당명은 그 당의 정체성을 규정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쇄신을 이유로 당명을 자주 교체하면 그 당의 정체성을 제대로 지킬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