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가량 알고 지낸 그는 단 한 번도 그날의 일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 그저 그의 가족 중 한 명에게서 전해 들었을 뿐입니다. "그는 5·18민주화운동 때 광주에서 시민군을 진압한 공수부대원이었어요."
쓸데없이 왜 그런 말을 하느냐는 표정으로 가족을 째려보던 그는 어렵게 말문을 뗐습니다. "나는 군인이었고, 명령대로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맹세코 시민을 향해 총을 쏘지는 않았습니다."
1980년 5월의 봄날은 평생 그를 짓누르는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그날, 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본인 외 아무도 정확히 모릅니다. 그는 그날의 일을 평생 숨겨 왔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어제(20일) 자 국제신문 디지털 뉴스 중에 가장 먼저 제목을 클릭하게 만든 것이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 때 공수부대원으로 투입됐다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앓는 A(66) 씨가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은 소식입니다. 항소심 재판부가 원심을 뒤집었습니다. 어떤 사연이 있을까요.
당시 시위대 해산 임무를 맡은 A 씨는 총상을 입었고, 동료 부대원이 장갑차에 깔려 숨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참혹한 현장 한가운데 섰던 그는 이후 정신질환에 시달렸는데도 시민에게 총칼을 겨눈 '가해자'란 비판 속에서 수십 년을 가슴앓이했다고 하네요.
A 씨가 처음 소송을 낸 2017년은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가 흥행하며 계엄군을 향해 사회의 부정적 시각이 확산한 때입니다. 1심 재판부는 군 직무 수행과 A 씨의 정신적 분노 조절 장애 간 인과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또 A 씨의 증상은 "개인적 분쟁 또는 민주화운동 진압군 비판 여론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판시했습니다. 군 생활이 질환의 직접 원인이 아니라 세월이 지난 후에 형성된 부정적 사회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로 해석되네요.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A 씨가 겪는 PTSD는 단순히 민주화운동 관련 여론 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과거 직무 수행으로 유발된 PTSD가 영화 등을 통한 반복적 재노출과 진압군 등에 대한 부정적 여론 형성으로 인해 더 악화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밝혔습니다.
기사 댓글 창엔 찬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섭니다. "군인은 명령에 움직이는 로봇이다. 잘못은 정권 탈환에 혈안이 된 전두환과 권력욕에 눈먼 장성들에게 있다" "시민은 민주유공자, 군인은 찬밥. 이게 말이 되냐" 등이 판결을 환영하는 반응입니다. "광주시민에게 사죄하고 유가족의 아픔을 달래주는 게 먼저다" "누구에게 살상 명령을 받았는지부터 밝혀라" 등이 반발의 핵심입니다.
판결이 옳은지, 그른지를 놓고 토론할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판결 직후 언론에 보도된 A 씨 소송대리인의 발언을 소개하고 싶네요. "A 씨는 스물두 살 어린 나이에 명령을 따라 광주에 갔다가 총을 맞았고 동료들의 죽음까지 목격했습니다. 전역 이후 평생을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죠. 한국 현대사의 비극입니다."
네, 비극이 맞습니다. 3년 전 이맘때, 12·12군사반란 주역이자 5·18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 씨가 반성은커녕 한마디 사죄도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습니다.
우연일까요. 운명일까요. 같은 날 이런 기사도 보도됐네요. 부산 해운대구가 청사 내 전 씨 부부 기념식수 표지석을 38년 만에 철거했다는 뉴스입니다. 이 표지석은 전 씨가 대통령이던 1987년 해운대구청을 방문했을 때 설치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일부 구민이 표지석에 반감을 드러냈고, 해운대구는 내부 논의 끝에 철거를 결정했다고 합니다.
이 두 건의 기사 역시 우리 현대사의 한 장면입니다. 또 세월이 조금 더 흐르면, 이에 대한 평가가 이뤄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