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민주 회복' '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온 시민을 덮친 것은 최루탄과 욕설 군홧발 곤봉이었습니다. 폭력으로 점철됐던 시위 현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안전하고, 비폭력적으로 변화했는데요. 오랫동안 대규모 집회 현장에서 사용되던 촛불이 어느새 응원봉으로 바뀌며 '꺼지지 않는 빛'이 거리를 환히 밝힙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여파로 윤석열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전국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종북·반국가 세력 척결'을 운운하며 선포한 계엄령이 6시간 만에 종결되자 이를 보다 못한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인데요. 10대부터 30대 젊은 세대, 특히 여성이 집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시위 문화가 사뭇 달라졌습니다. 이전부터 간간이 쓰였던 아이돌 응원봉이 이번 집회 때부터 규모가 불어나며 '새로운 시위 문화'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윤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대국민 담화가 있었던 지난 12일, 부산 서면 일대에서 열린 윤 정권 퇴진 촉구 집회에 남녀노소 가릴 것 없는 시민이 모였습니다. 하지만 시위라고 하기엔 분위기가 어쩐지 활기차고, 동시에 희망차기까지 했는데요. 거리를 가득 채운 유쾌하고 발랄한 문구가 적힌 깃발, 흘러나오는 케이팝 노래, 형형색색의 아이돌 응원봉은 얼핏 보면 콘서트나 축제 현장처럼 느껴지게 했습니다.
애정하는 대상을 향해 '너와 내가 함께 있다'는 의미로 흔들었던 응원봉이 집회에서 톡톡한 효과를 발휘하자 너도나도 빛나는 물건을 들고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야광봉, 무드등, 줄조명을 감은 막대, LED 머리띠와 팔찌 등이 시위 도구로 활용됐죠. 촛불집회에서 촛불뿐만 아니라 '절대 꺼지지 않는' 시위 도구가 등장한 배경이 있는데요.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촉구 시위가 벌어졌을 때,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촛불은 촛불일 뿐 바람이 불면 꺼진다. 민심은 언제든지 변한다"라고 한 탓입니다.
방탄소년단의 응원봉을 손에 꼭 쥔 채 집회에 참석한 A(30대) 씨는 "바뀐 시위 문화에 동참하고 싶어 응원봉을 들고나왔다"고 말했습니다. NCT 응원봉을 든 B(20대) 씨는 "우리는 꺼지지 않는 빛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기 위해 시위에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집회를 지켜보던 C(60대) 씨는 1980년대 시위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감회가 새롭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경찰이 길거리를 통제하면서 안전하게 시위할 수 있게 하잖아요. 내가 1980년대에 시위에 참여했을 때는 경찰이 잡으러 와서 이렇게 제대로 모이지도 못했어요. 젊은 친구들이 응원봉을 들고 시위하는 걸 보니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느낍니다."
다이소에서 구매한 응원봉을 들고 시위에 참석한 D(20대) 씨는 투표권이 없는 10대부터 '아빠가 미안하다'라는 피켓을 들고 있던 중장년층까지 한마음 한뜻으로 모인 현장을 보며 이상하고, 따뜻한 기분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나 많은 시민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사랑하고 지키고자 한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깨닫기도 했습니다. 저는 종종 '탈조선'이라는 단어를 쓰며 이 나라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말을 꺼내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 우리나라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요."